2006/07/12
'단순한 기쁨'을 읽고
피에르 신부님(1912~)은 현존하는 신부님 중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넓은 마음을 가진 분으로 생각한다. 프랑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인에 일곱 차례나 1위에 올랐다. 상류층 가정에 태어나 19세에 모든 유산을 포기하고 카퓨친회 수도회에 들어간다. 전쟁 동안에는 항독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투사였고, 전쟁 후에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했고, 엠마우스 빈민구호 공동체를 만들어 50년이 넘도록 빈민들과 노숙자들 부랑자들과 함께 생활한 가난한 자들의 대부이다. 신앙을 보다 더 생활에 밀접하게 표현하고, 하느님에 대하여 넓은 범위로 확대한다. 사람을 신자와 비신자의 구분하지 않고, 홀로 만족하는 자와 타인과 함께 만족한 자로 구분한다. 그 이유는 수천 년 동안 지구에 살았던 수천억에 달하는 사람들 가운데 성경과 복음과 예수를 알았던 이들이 몇 퍼센트도 안 된다는 사실로 설명한다. 나는 하느님이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다. 하느님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는다. 그분은 존재 자체가 사랑이며, 그것이 그분의 본질을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우리가 또한 그들 스스로 비신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간에 근본적인 구분이 없다고 확신한다. 가끔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혹시 그 사람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까 싶어 고민을 한다. 이에 가장 좋은 답을 얻는다. 그 분과 같은 마음으로 그냥 곁에 있는 것으로 위로가 된다고 한다. 고통을 받는 자들에게 충고를 하려 들지 않도록 주의하자. 그들에게 멋진 설교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신앙에 대한 설교일지라도 말이다. 다만 애정어리고 걱정스런 몸짓으로 조용히 기도함으로써, 그 고통에 함께함으로써 곁에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그런 조심성, 자비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경험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가장 정신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다. 일을 하면 언제나 고통이 따른다. 고통 없이는 어떤 일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조금 피곤하다고, 졸음이 온다고, 포근한 이불이 좋아서, 해야 할 일들을 포기하는 자신이 부끄럽다. 고통을 안고 열심히 생활해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삶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언제나 서서 일을 했다. 너무 피곤해서 앉기만 하면 잠이 들곤 했기 때문이다.
나는 복음서를 읽고 또 읽었다.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고 내가 고통 받으면 나도 고통 받는다.
예수께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 이외의 그 무엇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들은 외관상 아무것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비생산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그들과 그들이 비밀리에 쏟아내는 사랑이 없다면 인류는 아마도 이미 증오의 무게에 짓눌려버렸을 것이다.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나는 나의 하루를 하느님께 봉헌한다.
누군가 우리에게 잘못을 했을 때에는 항상 이렇게 자문해 보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지 않을까?"
그는 금식하며, 쉬지 않고 기도를 드리고, 갖은 고행을 행한다. 그만큼 뉘우치는 마음이 컸던 것이다. 그러자 하느님은 그의 잔혹한 범죄를 용서하신다. 그의 통회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고받는 용서는 사랑을 크게 하며 우리의 마음에 더할 나위없는 기쁨을 안겨준다.
오직 하느님만이 죄인을 심판하고 판결을 내릴 수 있다. 잘못을 저지르는 한 개인의 책임감은 어느 정도일까? 하느님만이 그 사실을 아신다. - 본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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