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7/08
'성(聖)과 성(性)의 영성'을 읽고
- 글쓴이: 로널드 롤하이저 | 옮긴이: 유호식 | 출판사: 성바오로 | 2006년 4월 21일
신앙생활의 위기가 왔다. 어떻게 하나? 이 책을 읽고, 새로운 방향을 세워본다. 아직 그 위기의 영향에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모든 것에 감사한다. 새로운 마음으로 보다 나은 삶으로 가고 싶다.
단순하고 정직하고 싶다. 거짓없이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며, 양심에 따라 살고 싶다. 그리고, 숙고한다. 모든 일들을 마음에 간직한 상태로 십자가 밑에서 그냥 서 있고 싶다.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끝에 승리의 기쁨을 가지나, 예수님은 궁지에 몰려 더 이상 선택의 여지 없이 싸우거나 죽을 수밖에 없을 때 죽음을 선택하였다.
이제는 가진 자와 아는 자를 위해서 봉사하고 싶지 않다. 가진 자와 아는 자는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제는 가지지 못한 자와 알지 못하는 자를 위해 봉사할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한 자를 말한다. 가장 나약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 정직하게 나 자신을 돌아보고 싶다.
나의 대자들을 생각한다. 나의 대자들은 어렵고 힘든 사람이 많다. 잘 되어야 하는데... 대화도 하고 도울 방법이 있으면 찾아보아야 되겠다. 내가 대자를 사랑하는 한 그리스도의 옷깃을 만지는 것이다. 멀어지는 대자들을 이제는 챙기고 싶다. 대자외에도 교회에서 멀어져 있는 사람에게도 사랑을 주고 계속 접촉을 유지하고 싶다.
'잘 지내니?' 하고 인사를 한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잘 웃니? 잘 먹니? 잘 자니?' 라고 했다.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는 것으로 우리의 삶은 행복하다.
매일 매일 죽자. 오늘 잠들면 내일은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강생의 신비이다. 파스카의 신비가 한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우리 생활에서 반복하는 것이라고 한다. 죽음과 같은 고통을 받이들이고, 또 새롭게 부활하는 것이다. 나 자신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영성체를 통하여,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나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현존케 해야 한다.
끊임없이 타오르는 욕심으로 완전한 평온함을 얻기가 불가능하다.
삶은 단지 어쩌다 조용하고 한가로운 평온을 만날 뿐이다.
영성의 본질은 개인기도, 사적윤리의식, 사회정의, 마음과 정신의 부드러움,
참된 예배를 위한 공동체에 있다.
교회는 '~로 부터 부르심 받음'이라는 뜻이다.
가톨릭이란 보편적이며 넓고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뜻이다.
어머니가 편찮으면 낫게 해달라는 기도와 함께 어머니를 의사에게 모시고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가 아니라 유신론자이다.
고해성사의본질은 언제나 진심에서 우러나는 통회에 있다.
자선행위가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는 것이라면
사회정의는 그 구조를 변화시켜 지나치게 빵을 많이 갖는 사람도,
빵을 얻지 못하는 사람도 없도록 하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 날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접했느냐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
- 본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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