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위기 사랑의 위기'를 읽고
- 글쓴이: 토마스 키팅 | 옮긴이: 성찬성 | 출판사: 바오로딸 | 2001년 11월 25일
신앙의 위기, 사랑의 위기, 제자 양성으로 3부로 나누어져 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승천 성령강림때 제자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위기라고 한다.
그리고 그런 위기는 우리에게 계속 일어나고 있다.
예수님께서 친하게 지냈던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사랑의 위기를 이야기한다.
제자 양성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진정한 제자로 만들어 가는 과정을 말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로 성령 강림때까지 엄청한 신앙의 위기를 가진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숨어서 지낸다.
성령 강림으로 제자들은 신앙의 위기를 극복한다.
성령이 신앙의 위기를 구해준다.
이런 이유로 신앙이 깊은 사람은 어떤 축일보다도 성령강림대축일을 좋아한다고 한다.
나에게도 중요한 대축일로 되었으면 한다.
신앙의 위기는 보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한증 깊이 파고들도록 초대하는 기회가 된다.
이 같은 변천으로 인해, 이제까지 우리가 의지해 온 사람들은 더 이상 우리를 도울수 없게 된다.
우리가 오로지 성령께만 매달리기 위해서는-모든 사람이 아니라 지나치게 의존하는 사람들에게서-
독립하는 것도 성장의 한 요소이다.
바로 이것이 영적 성장이다.
우리가 애원하면 할 수록 우리의 탄원은 더욱더 외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땅바닥에 바짝 엎드리면 엎드릴 수록
하느님은 우리에게 더욱더 납작하게 엎드리도록 요구하시는 듯하다.
이때 진실로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부르짖음을 예수님께서는 외면하시는 듯하다.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쓸모없는 종'이요
'자녀들이 먹을 빵'을 먹을 자격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당하게 은총을 요구할 권리가 하나도 없다.
그리고 바로 이 같은 엄연한 사실을 직시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공로를 믿던 자신감에서 그분의 자비를 믿는 신앙으로 옮겨간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손을 잡고, 말하자면 나약한 신앙에서
강하고 살아 있는 신앙-당신이 점점 희망으로 변화시킨 어떤 신앙-으로 한걸음씩 인도하셨다.
그들이 그분께 희망을 걸었던 것은 하느님께로 향하는 완전한 몸돌림, 말뜻 그대로 회심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신앙의 위기를 푸는 최종적인 해답이기도 하다.
우리가 세상의 이목이나 우리 자신에게 대단해 보이는 어떤 것을 바치는 데
목표를 두는 것은 헛된 일이다.
지적인 사람들은 넘치는 재치로 그리스도께 도달하고자 하는 은밀한 희망을 마음에 품고 있다.
의지가 강한 사람들은 금욕생활이나 활동으로 그리스도께 도달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런 접근 방법은 유익하기는 해도 궁극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이다.
나의 세례명은 베드로이다.
왜 어머니는 나의 세례명을 너무 유명한 베드로로 정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나의 심성으로 짐작해보면 스스로 원했던 세례명인 것 같다.
자주 접할 수 있는 베드로라는 세례명과 모든 이에게 널리 알려진 세례명을
그냥 좋다고 선택한 것으로 짐작한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아주 가까운 사이며, 하고 싶은 말을 주저없이 예수님께 한다.
경솔한 베드로는 끝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완전한 실패작이요 지독한 허풍선이임을 깨달는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진정한 제자로 만든다.
당신의 나라는 정치 권력과 야심 또는 위세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십자가로 세워진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베드로는 사도단의 우두머리가 뜻하는 의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었다.
예수께서는 책망하는 법을, 최정상의 사람에서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누군가를 제자리에 앉히는 법을 알고 계셨다.
우리가 우리의 영역을 벗어나면 그분은 우리에게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주신다.
예수께서 손수 빚어 만드신 위대한 사도 베드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온유하면서도 확고하게 우리를 붙잡아 같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신다.
그분이 모든 사도에게 궁극적으로 물으시는 것은
그가 무엇을 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당신을 사랑하는가 하는 것이다.
"네가 나를 정말로 사랑하느냐?"
이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답변이야말로 참된 사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마르타와 마리아...
아직 완전한 이해가 안된다.
마르타는 겉으로 보이는 행동으로 열성적이나 열매을 가지지 못하나
마리아는 믿음과 기다림으로 열매를 가진다.
라자로는 죄 속에 살고있는 우리의 삶을 그대로 표현한다.
성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7월22일)
커다란 시련 한 가운데서 신앙을 굳건히 지킴으로써 얻게 되는 지고한 신뢰와 사랑이다.
이 세 여인은 내가 신앙의 위기라 일컫는 어떤 것을 성공리에 통과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전례에서 비단 이 세 여인뿐 아니라
고통과 수모를 통헤 하느님의 사랑으로 성공리에 건너간 모든 이들을 기리는 셈이다.
사실 라자로는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을 뿐 늘 병들어 있었다.
이 질병은 그가 병들어 있음을 깨닫고 병이 자연스럽게 진행되어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면서 끝나도록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래야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를 일으켜 세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은 결실인 - 여기서 예고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완전한 생명에 이르도록 하실 수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끝까지 낮추어야 한다.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귀중히 여기시는 것은 진실로 겸손한 마음에서 나오는 자기 포기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리가 안다 하더라도
계속 노력하도록 여전히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순종하고, 그처럼 혹독한 말을 받아넘기고, 원수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때로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우리를 부추기며 말씀하신다. "네가 노력하기만 하면 1점을 주겠다."
사람이 몰락할 때 누군가가 다가와서 그늘 마치 짓밟거나 지독히도 경망스런 말을 해댄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하느님의 특별한 총애를 받는 한 과정이다.
하느님은 그를 집중적으로 정화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가 가슴을 너무 내미거나,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고 할 때마다
우리에게 일어날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일에 걸려넘어지게 하신다.
그러나 이때야말로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기도할 때이며,
치유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기다릴 때이다.
기다림!
무척 좋아했던 말이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무엇을 기다리는 자체를 무척 좋아했다.
지금은 이 기다림을 잃어버렸다.
새롭게 기다림을 좋아하자.
우리의 믿음이 깊을 수록 우리의 기대에 대한 응답은 그 만큼 더디게 나타날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와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음을 아시고
우리보다 더 불행한 다른 사람들에게 매달리신다.
기다림처럼 겸손한 것은 없다.
시간이 창조된 이유도 우리가 기다릴 줄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기다림은 우리가 우리를 기다리게 만드는 사람에 비해 열등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 본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