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소중한 나'를 읽고
- 글쓴이: 안셀름 그륀 | 옮긴이: 전헌호 | 출판사: 성바오로 | 2000년 12월 26일
참 소중한 나.
개인주의 성향이 짙은 나에게는 당연히 소중한 나 자신이다.
처음에는 모두 아는 내용으로 미지근하게 읽기 시작하나, 점차 흥미가 있는 내용이 나온다.
있는 그대로의 나.
나는 나이다. 현재 생긴 모습 그대로다.
잘 생겼다고 우겨도 못 생긴 것이 사실이다.
스스로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무능하다고 한다면 무능한 것이다.
넘치는 사랑이 있어도, 사랑이 없다고 한다면 없는 것이다.
나는 주변의 불확실성과 장애들 속에서도 언제나 가치로운 존재이다.
자의식이 몹시 강한 사람은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약한 부분조차 남 앞에 드러낼 수 있을 만큼 나 자신에 대해 믿음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가치를 느끼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여 부풀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종류의 약점들과 한계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의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실수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인정할 수 있는 사람,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 옆에 서 있는 사람,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자신의 가치에 대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고,
자신의 부족한 면들, 편안하지 않은 면들까지도 다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치를 느끼는 것은 나 자신이 바로 이 유일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과
하느님이 나를 통해서 이 유일한 말씀을 표현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대에게 이릅니다. 일어나 그대의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시오.(마르 2,11)
이렇듯이 골모리를 아프게 하는 꼴똘한 생각들은 모두 그가 일어서는 데에 방해만 될 뿐이다.
예수는 우리더러 장애때문에 절름박이가 되었다고 주저앉아 있지 말고 장애를 받아들여
옆구리에 끼고 있는 침상은 우리가 아직도 불신과 장애 속에 있음을 떠올리게 한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오시오. (미르 3,3)
이제 그는 더 이상 사람들 속에 자신을 감추어 둘 수 없다.
모든 사람들 앞에 자신의 참 모습을 내보여야 한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 서 있어야 한다.
이제 그는 자신의 모든 면면을 자세하게 검열받는다.
예수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한다.
하느님께 계명을 지키는 것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자신의 믿음을 그는 행동으로 보여 준다.
우리 자신에 대해 스스로 만들어 온 환상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라고 생각해온 긴긴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겸손과, 그리고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인간성을 받아들일 용기와 관계 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는지, 칭찬하는지, 옳다고 인정하는지에 대해서만 온통 관심을 모은다.
그들은 자기 자신으로 홀로 서지 못하고 자신의 영역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을 자신과 연계시켜서 보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는 아주 작은 비판에도 크게 상처를 입는다.
나는 나의 가치를 외적인 성취를 통해서 증명할 필요도 없다.
우리 스스로 절제하면서 좋은 습관과 건강한 질서를 통해 자신을 다듬어 나가야 한다.
아들을 위하여.
자신이 존중되고 있는다는 체험을 하도록
작은 잘못을 하더라도 인정하고 받아주고 싶다.
언제나 잘못만 눈에 보인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참고 기다리자.
자신의 가치를 느끼는 능력은 날 때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가족 안에서 배우는 것이다.
그것은 어린아이가 부모로부터 인정받고
가치 있는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체험할 때마다 조금씩 길러지는 능력이다.
어린이는 자신이 존중받고 있는지,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지를 부모의 표정을 통해서 느끼고 인식한다.
어떤 남자는 아버지에 대해 무기력을 느낀다.아버지는 영리하여 하지 못하는 일이 없고,
아들이 이룩하는 가치는 언제나 하찮게 여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인정을 받으려고 더욱 애를 쓰지만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를 채울 수가 없다.
그리고 아버지의 빈정거림과 무자비한 평가들에 대해 자신을 방어해 내지고 못한다.
미사를 모두 어렵고 힘들어 한다.
미사 시간에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밝은 모습을 찾기가 힘들다.
나는 환한 모습으로 보여지기를 기도하고,
즐겁게 미사를 드린다.
전례를 거행하는 중에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운다면,
사람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도록 유도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죄인으로 느끼게 해서 하느님 앞에 몸을 굽히도록 하고,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여기도록 한다면,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전례를 거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몸을 일으켜 세우게 해서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하여
자신 안에 들어 있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신적 가치를 발견하도록 할 경우에만
예수가 의도한 전례를 거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례를 거행하고 있는 동안에 똑바로 서서 행렬을 하거나 두팔을 펼쳐 들고
하느님을 찬미하거나 하는 동작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품위를 표현한다.
용서!
우리는 언제나 잘못한 이를 용서하라고 한다. 무조건 용서하라고 한다.
무조건 용서하라니,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용서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잘못한 이를 먼저 마음속에서 버려야 한다.
시간이 지나 마음에서 멀어지면 보다 객관적인 입장이 되고 용서가 가능하다고 한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아직도 내 마음속에 있는데도
벌써 용서하는 것은 자신을 학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행위는 나 자신을 스스로 다치게 할 수도 있다.
내가 그와의 거리를 유지하고 나서야, 내가 그를 나로부터 밖으로 내던져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도 역시 상처 입은 한 영혼에 지나지 않은 존재란 사실을 깨닫고
그를 참으로 용서할 수 있다.
무력함을 느낀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해가 저물면 또 하루를 후회한다.
무력함은 인간이 이 세상에 사는 한 붙이고 있어야 하는 본질적인 느낌이다.
인간은 힘과 무기력을 함께 지니고 있다.
인간은 이 세상과 자기 자신을 다스릴 힘을 지니고 있지만
또 자신을 제어하는 데 무기력하며, 하느님에 대해서도 무기력하다.
내가 나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면 나의 무기력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갈 것이다.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모두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의 삶 중에 어떤 부분들을 변화시켜 갈 수는 있다.
- 본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