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철학자) 저, 정현종 역, 물병자리, 2002.04.25
몹시 어려운 책이다.
한 구절 한 구절을 몇 번을 읽어보니 그 뜻을 이해한다.
우리는 '야! 한번 생각보아라'라는 표현을 자주한다.
그런데, 생각은 우리가 본 이미지-실제가 아닌 겉모습-를 모으고 모아서 알고 있는 지식을 결합하여 가공한다.
생각에 의해 우리는 점점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라는 것이다.
우리 자신 참모습과 참마음을 위하여 생각을 하지 말고, 똑바로 쳐다보자라고 표현해야 되겠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롭기 위해서는,
우리가 매일매일 만들어온 이미지에 대한 생각들을 죽어야 한다.
자연 속에 존재하는 한 생명체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그대로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나에게 또 다른 향기가 있다면, 바람부는대로 그 향기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다음은 책에서 몇구절을 가져온다.
결국 당신은 혼자 남게 되며, 모든 것에 대해 진지해진다.
그리고 더 이상 누구한테도 또는 어떤 것에게도 도움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이미 무언가를 발견해야 한다는 사실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자유가 있으면 에너지가 있다.
그리고 자유가 있으면, 그것은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는다.
자유는 저항과는 완전히 다르다.
자유가 있을 때 거기엔 잘한다든가 못한다든가 하는 일이 없다.
당신은 자유로우며 그것을 중심으로 행동한다.
그러므로 거기엔 공포가 없으며, 그런 두려움 없는 마음은 위대한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사랑이 있으면 그것은 하고자하는 바를 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것이든 다른 사람의 것이든 모든 권위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어제의 모든 것이 죽는다는 뜻이며,
그때 당신의 마음은 항상 신선하고 젊고 천진하고 활력과 정열이 넘치게 된다.
누군가 내 몸에 핀을 꽂으면 마비되어 있지 않는 한 나는 반응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은 그 즐거움을 되씹어 보며 그것을 쾌락으로 만든다.
생각은 그 체험을 되풀이하고자 하며,
그래서 되풀이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더 기계적으로 변한다.
그것에 관해 생각하면 할수록 생각은 쾌락을 부추긴다.
그러므로 생각은 욕망을 통해서 쾌락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며,
그 결과 어떤 아름다운 것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은 생각에 의해 뒤틀리게 된다.
생각은 결코 새롭지 않다.
왜냐하면 생각은 기억, 체험, 지식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생각은 낡은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즐거움을 가지고 보고 잠깐 동안 엄청나게 느꼈던 것을 낡은 것으로 만든다.
당신은 낡은 것에서 쾌락을 끌어내지, 결코 새로운 것에서 끌어내지 않는다.
새로운 것 속에는 시간이란 없다.
당신은 기쁨에 관해 생각할 수 없다.
기쁨은 즉각적인 것인데, 당신이 그것을 생각함으로써 쾌락이 된다.
현재에 산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즉각적으로 지각하는 것이며,
그것에서 쾌락을 찾지 않는다면 커다란 기쁨이 된다.
우리 모두는 관념 속에서, 이론 속에서, 상징 속에서 살고 있으며,
자신과 남들에 관해 만들어낸-따라서 전혀 실제가 아닌-이미지들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의 모든 관계는, 그것이 재산과의 관계든 아니면 관념이나 사람들과의 관계든,
근본적으로 이 이미지의 형성에 근거해 있으며, 따라서 거기엔 언제나 갈등이 있다.
가난은, 옷이 좀더 많고 먹을 것이 좀더 많다고 하더라도
-도대체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사회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과시하려는 충동이 있다.
마음이 사회로부터 자유로울 때 가난은 놀랄 만큼 아름다운 것이 된다.
우리는 내적으로 가난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아무런 요구나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무것도, 이 내적 가난만이 삶의 진실을 볼 수 있으며 거기엔 갈등도 없다.
나는 있는 것을 실제로 본다.
나는 좋고 싫고에 상관없이 그것을 본다.
나는 그 의존을 없애고 싶지도 않고 그것의 원인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것을 관찰하고 그러한 관찰이 있으면 나는 그림의 조각이 아니라 그림 전부를 볼 수 있으며,
또 마음이 그림 전부를 볼 때 자유가 있게 된다.
당신이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보듯 그것을 사실로서 분명히, 똑바로 보기만 한다면,
당신은 아무런 갈등도 없는 삶의 진실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 때, 죽음은 삶과 매우 흡사하다.
당신은 죽음 없이 살 수 없다. 이것은 지적 역설이 아니다.
하루하루 마치 그것이 새로운 아름다움인 양 완벽하게 살려면 어제의 모든 것은 죽어야 한다.
당신이 죽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정말 알고 싶다면 당신은 죽어야 한다.
이것은 농담이 아니다. 당신은 죽어야 한다.
육체적으로가 아니라 심리적으로, 내적으로,
당신이 소중히 품어온 것들과 쓰라려 하는 것들에 대해서 죽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당신이 쾌락 가운데 하나에 대해서, 가장 작은 것과 가장 큰 것에 대해서
아무 강제나 논의 없이 자연스럽게 죽는다면, 당신은 비로소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완전히 마음을 비우는 것을 뜻하며, 그것의 일상적인 소망, 쾌락, 괴로운 격정들을 비우는 것이다.
죽음은 새로 태어나는 것이요 변화이며, 그 안에서 생각은 전혀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생각은 낡은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을 때 거기엔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이 있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는 곧 죽음이며, 그러면 당신은 살고 있는 것이다.
향기로운 꽃처럼 당신은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또 그 옆으로 지나갈 수도 있다.
그 꽃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으로,
그것을 깊이 들이마시려 애쓰고 기쁨으로 그것을 보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누가 정원에 아주 가까이 있든 아니면 아주 멀리 있든 꽃에게는 마찬가지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향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모든 사람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하늘의 별을 바라볼 때, 거기엔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 있는 당신이 있다.
하늘은 빛나는 별들로 넘치고 서늘한 공기가 있으며 그리고 당신이 있다.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는 것이며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는 아는 것에 대해,
마음의 상처와 감언이설에 대해,
당신이 만든 모든 이미지와 체험들에 대해 매일 죽을 때에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매일 죽어야만 뇌세포들이 새로워지고, 젊어지고, 순수해진다.
명상은 기술을 갖지 있지 않으며, 따라서 권위가 없다.
당신이 자신에 대해서 배우고 자신을 관찰할 때,
당신이 어떻게 걷고 어떻게 먹는지를 관찰하고, 당신이 말하는 것 가십 증오 질투를 관찰할 때,
그 모든 것을 아무 선택 없이 당신 자신 안에서 알아차릴 때, 그것이 명상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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