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버려라
- 오쇼 라즈니쉬의 임제어록 강의 | 손민규 옮김
법정 스님의 글을 통하여 임제 스님을 알고
도서 선택에 오류를 범한 끝에, 쉽지 않게 임제 스님에 대한 책을 선택했고, 바로 그 책이 '마음을 버려라'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철학은 아니지만, 곧 무언가를 얻을 것 같다.
불교에 대해 갑자기 궁금한 점이 많아졌다.
화엄경 반야심경 도덕경을 읽을 예정이다.
삶과 신앙에 대한 좋은 말씀이 많은데, 왜 한쪽으로만 치우쳐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진실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음에도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신앙인에 연민을 가진다.
또한 스스로 빨리 깨우치지 못한 나 자신의 게으름도 인정한다.
부지런하지 못해, 그냥 현재에 만족하고, 하루 하루를 그냥 살았다.
진짜 삶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음을 버려라'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적어본다.
임제는 '할'의 조사로 알려졌다.
그는 상대를 침묵시키는 수법으로 할을 사용했다. 갑작스런 일갈!
임제는 중심에 머무는 최초의 체험을 주기 위해 제자들에게 호통을 친 것이었다.
그대는 주변과 중심 양방면에 걸쳐 있다.
그러나 그대는 주변에 기대어 살고 있다.
할은 그대를 중심으로 되돌려 놓는다.
일단 중심에 존재하는 체험을 맛보면 그대는 홀연 온 세상이 변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그대의 눈은 옛날과 같지 않다.
그대의 눈은 완벽히 맑아서 한 점의 티끌도 없다.
똑같은 푸른 잎이라도 더욱 선명하게 비친다.
똑같은 장미꽃이라도 더욱 뚜렷하게 비친다.
똑같은 삶이라도 축제로 보인다.
그대는 춤추고 싶을 정도이다.
참된 종교는 도덕을 설하지 않는다.
도덕은 저절로 나타난다.
참된 종교는 자기 자신의 중심에 머물 것을 가르친다.
그때는 일체의 선(善)이 따르게 되며, 악한 것은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대는 무조건 선하다.
그대가 선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 이외의 태도가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선(禪)의 기적이다.
선(禪)은 단순히 주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나는 자유롭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
누구 한 사람 수갑을 차고 있지 않으며, 끈으로 묶여 있지도 않다.
그러나 조금만 다가가서 보면 그대는 지나치게 많은 끈으로 묶여 있다.
그것이 그대를 어떤 방향으로 잡아당기고 있다.
게다가 거의가 모순된 방향으로 잡아당긴다.
그것이 분열된 인격을 만들어 내고 단편화된 인격을 만들어 낸다.
그대는 이 끈을 사랑이라 부를지 모른다.
그대는 이 끈을 야심, 욕망, 질투, 미움이라 부를 수도 있다.
뭐라 부르든 다를 게 없다. 그것은 모두 끈이다.
그대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든 그것들은 모두 끈이 된다.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는 마음만이 자유가 뭔지를 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이 엄습할 때야 겨우 알아챈다.
"나는 사는 것같지 않게 살아왔다. 춤추기도 못했고,
꽃을 피우지도 못했으며, 자기 자신을 알지도 못했다.
그런 가운데 죽음이 오고 말았다."
진리는 부정할 수도 없으며, 어떤 증거나 증명을 제시할 수도 없다.
사람은 진리로 살아나가야 한다.
'삶' 자체가 유일한 증거이다.
깨달은 사람은 누구나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
그는 새로운 빛, 새로운 생명, 새로운 눈을 갖고 온다.
그런데 그대들은 그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자기들보다 더 알고 있는 자가 있다는 사실에 화를 낸다.
그들은 그런 인물에 대해 참을 수 없다.
세상에서 사색하는 것 이상 가는 범죄 행위는 없다.
이 세상에서 알고 있는 자는 스스로의 십자가를 준비한 것이다.
선 수행자의 노력은 마음을 초월하는 것, 무심에 도달하는 것,
사랑을 포함한 일체의 사고를 완전히 비우는 것이다.
신은 허공의 길이다. 신도 없고 사랑도 없으며, 일체가 부정된다.
그대마저 사라진다. 단지 순수한 '무(無)'이다.
누가 거기에 있어 타는 걸 느끼겠는가?
거기에 누가 있어 불을 느끼겠는가?
이슬람교, 유태교, 기독교 모두가 가설에 기초하고 있다.
가설에 기초하지 않는 종교는 두 개밖에 없다. 불교와 도교다.
선은 이 두 가지의 교배다. 그리고 교배로 나온 것은 늘 어버이보다 우수하다.
선은 붓다와 노자의 만남이다. 이 만남 속에서 선이 나왔다.
선은 불교가 아니며 도교도 아니다.
선에는 독자의 개성이 있다.
선은 붓다로부터 온 모든 아름다운 것과 노자로부터 온 모든 위대한 것을 전하고 있다.
선은 지금까지 인간이 도달한 최고의 절정이다.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내가 깨달음을 얻은 순간, 놀랍게도 전 존재가 깨달음을 얻었다.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그들은 '깨달음'을 자기 안에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그걸 모르고 있다."
누구나 붓다인 것이다.
단지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에게 7일 간 끊임없이 최면을 건 뒤,
그 최면에서 깨어나면 어느 곳에서나 모든 사람에게서 신을 볼 수 있고,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고 애정도 깊어진다고 암시를 걸어 보라.
7일만 있으면 그 사람은 마치 컴퓨터처럼 프로그램화 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신을 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진실이 아니다.
그대는 이 순간에 깨달음을 얻고 있다.
다만 스스로의 실존으로 고요히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스스로 실존의 중심을 찾아내라.
그렇게 하면 그대는 전 우주의 중심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주변에서는 분리되어 있지만 중심에서는 하나다.
나는 이것을 붓다 체험이라 부른다.
소크라테스는 최후의 날에 말했다.
"젊은 시절 나는 스스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이가 더 들어 의식이 예민해지면서 갑자기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선이 비어 있는 가슴을 말할 때는 단순히 비어 있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선의 입장에서는 가슴이든 마음이든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비어있음:空'이다.
'비어 있는' 마음은 어디에나 충만해 있는 '거룩한 것'과 통하는 문이 된다.
그러나 먼저 마음이 비어 있어야 한다.
온갖 종류의 원시적인 마음이 간직한 공포-신들, 천국에 대한 욕망, 지옥에 대한 공포-가
끊임없이 아이들에게 강요되고 있다.
그것은 교육 체계 속에서 존속되고 있다.
노예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혁명가를 창조해야 한다고 공언할 수 있는 교육 체계는
현 시점에서 단 하나도 없다.
세상은 노예들로 가득 차 있다.
임제는 붓다의 추종자가 아니다.
"붓다의 말이 나의 경험과 맞지 않는다면 나는 그를 반박할 것이다."
이것이 선의 전통이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전통이다.
그들은 붓다를 숭배할 것이다. 그들은 불상 앞에 꽃과 노래를 바칠 것이다.
그러나 경험에 관한 한, 그들은 붓다가 반대한다 해도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의식을 신뢰한다.
자신의 의식에 관한 한, 그들은 고탐 붓다조차 반박할 것이다.
용기를 가진 사람은 자기만의 길을 발견한다.
그는 어떤 사람의 깨달음을 즐기고 그 사람을 스승이라고 부르며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스승은 결코 그를 추정자로 부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약간 뒤쳐진 친구일 뿐이다.
몇 발자국만 더 나가면 그 또한 붓다가 될 수 있다.
그를 추종자로 전락시키는 것은 중대한 모욕이다.
그런데 모든 종교는 그같은 짓을 해왔다.
그들은 인류 전체를 노예로 전락시켰다.
고탐 붓다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나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붓다가 되지 않는 한, 나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대들이 내가 즐거워하고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다른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붓다가 되라!"
그대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대는 다만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할 뿐이다.
이것이 성직자와 소위 성자라는 자들이 하고 있는 일이다.
그들은 그대가 원하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단 하나의 대답, 그것은 무심이다.
사념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침묵하라.
어떤 공안이 주어지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대답은 항상 똑같다.
완전한 침묵, 동물의 마음을 넘어선 침묵만이 그 대답이다.
단 하나 버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이다.
마음을 버렸을 때, 그대는 우주 전체를 손에 넣는다.
그대는 온 우주에 의해 환영받는다.
결코 '나는 믿는다'고 말하지 마라.
그것은 인간이 발명한 가장 큰 거짓말 중의 하나이다.
안다면 그저 안다고 말하라. 모른다면 모른다고 말하라.
신앙은 존재계 어디에도 있을 곳이 없다.
'나는 믿는다'고 말할 때 그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대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모른다. 하지만 틀림없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뀨는 이렇게 읊었다.
경전 공부와 엄격한 수행의 사이에서
나의 마음은 거의 미칠 지경이다.
하지만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어부의 노랫소리이다.
석양과 비, 구름과 달이 흐르고,
밤마다 언어를 초월한 노래가 들린다.
인간 또한 강의 언덕만큼 행복하고 평화로울 수 있다.
달과 그 아래 비치는 모든 것에 마음이 없다는 것을 관찰한다면
인간 또한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자신의 어리석은 관념에 매달린다.
모든 존재계가 즐거움에 춤추고 있는데 인간만이 근심에 싸여 있다.
나무가 근심하는 것을 보았는가?
어떤 동물도 근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평화롭게 죽는다.
태어난 것은 죽기 마련이다.
그것이 존재계가 움직이는 방식이다.
인간은 모든 것이 자신의 의사대로 되기를 바란다.
존재계를 자신의 의사대로 바꾸려는 것,
이것이 모든 불행의 근본이다.
그대의 마음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관념대로
사물을 조정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존재계를 바꿀 수 없다.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인간이 실패하는 것은 실수 때문이 아니다.
방법이 틀렸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 아니다.
존재계에 맞서는 한, 그는 무엇을 하든지 실패할 것이다.
아무도 존재계보다 지혜로울 수 없다.
그러므로 현명한 자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존재의 강에 자신을 맡길 것이다.
가슴을 열고 존재계와 조화를 이루어라. 긴장을 풀어라.
그러면 돌연 둥근 달이 홀로 빛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동료도 필요없고 부(富)도 필요 없다. 정치적인 지위도 필요 없다.
강산이 모두 평화롭다. 그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
하지만 그대가 돈으로 살 수 없는 평화를 가졌다.
벚나무는 묵묵히 기다린다. 벚나무는 서둘지 않는다.
봄을 잡아 오기 위해 다른 곳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즐거움에 잠겨 기다릴 뿐이다.
드디어 봄이 온다. 하루 이틀 늦는다 해도 그게 대수인가?
봄은 항상 다가오고 있다.
"고탐 붓다의 가르침에만 의존하지 마라."
왜냐하면 그의 가르침은 지금과 다른 상황에서 행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대는 고탐 붓다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과 다를 것이다.
그리고 시대가 바뀌었다.
이제는 붓다의 가르침이 합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붓다가 말했다.
"내게는 즉각 정해진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고정된 철학이 없다.
너는 이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나는 눈앞에 있는 사람과 그의 능력을 본다.
나는 아무도 모욕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주고 싶지 않다."
주시 안에서는 그대의 퍼스낼러티(personality)가 부재한다.
그대의 마음, 생각, 감정 등 마음속에 갖고 다니는 모든 것이 부재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빈 마음(empty mind)'이 곧 무심이다.
우리의 삶에는 모든 것이 조건지워져 있다.
환경에 의해, 전통에 의해 모든 것이 특정한 조건의 테두리에 갇혀 있다.
이 말은 그대의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이 외부에서 온 것이다.
그대는 다만 그것들이 모이는 집합 장소일 뿐이다.
그대 자신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대는 완전히 빈털터리이다.
선은 그대가 아무 조건 없이 삶에 접근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아무 편견 없이, 선입관과 기대감 없이 삶을 대하라는 말이다.
그대는 자신의 중심에 서 있을 때에만 전체적이 될 수 있다.
존재계에 아무 조건도 부여하지 마라.
존재계에 압력을 넣지 마라.
그대에게 무엇이 오든 그저 받아들이고 기뻐하라.
아무 조건도 없는 사람에게 존재계는 놀랄 만큼 풍요롭게 다가온다.
그대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모든 보물, 모든 신비가 그대의 것이 된다.
만물은 춤추고 즐기고 노래하라고 있는 것이다.
가치에 대해 묻지 마라.
무엇이 덕(德)이고 무엇이 선(善) 인지 묻지 마라.
모든 것을 즐겨라.
삶은 어디에서도 끝나지 않을 것이며,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고 순례의 길을 가라. 길이 끝나는 지점은 없다.
새로운 인간의 신은 더 이상 하늘에 있지 않다.
그 신은 새로운 인간 안에 있다.
더 친밀하고 더 가깝게 있다.
새로운 인간은 신을 숭배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삶 속에서 신을 살 것이다.
그는 신을 노래하고 춤출 것이다.
그 자신의 신의 사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새로운 인간은 붓다라고 부른다.
이제, 이슬 방울은 바다로 사라졌다.
어디서 이슬 방울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것을 어떻게 이름 붙일 수 있겠는가?
그대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바다와 하나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전부이다.
이슬 방울은 작은 바다였다.
그래서 바다와 하나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슬 방울은 스스로 작은 한계 안에 갖혀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한계를 벗어 던지고 바다로 사라졌다.
이것은 이슬 방울이 죽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더 이상 이슬 방울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