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이야기

아래로부터의 영성

bike 2006. 9. 22. 15:50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읽고
- 글쓴이: 안셀름 그륀, 마인라드 두프너 | 옮긴이: 전헌호 | 출판사: 분도출판사 | 1999년



지난 4월부터 나에게는 힘든 신앙생활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책을 선택했다.  극복하는 방법을 찾기 위한 것이다.

책을 통하여 많는 것을 깨닫는다.


"아래로부터의 영성"
신앙의 위기를 극복하는 마지막 책이다.

성당에서 많은 활동을 하면서, 처음 마음을 잃었다.
처음 마음은 사라지고, 의무와 완벽으로 마음보다 덕행에 관심이 많이졌다.
덕행을 쌓기 위해 과로하였다.
과로와 겹친 단순한 한마디에  넘어지고 말았다.

신앙의 위기로, 현재 성당에서의 모든 활동을 중단한 상태다.
처음에 가졌던 마음으로 돌아간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지?
삶에 대해 경건함을 가졌던 신앙으로 돌아간다.
이런 기회를 주신 모든 분께 감사한다.

 

하느님은 이미 존재하셨고,
예수님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실천을 보이신 분이다.
우리의 삶은 성서를 심독하고 성인의 모범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며,
겸손한 삶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영성
   자신들이 지닌 고통들에 대하여 묵상하고 묵묵히 지고 나가는 과정에서 그 고통들을 통하여
   하느님을 올바르게 깊이 인식하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위로부터의 영성
   가장 이상적인 방법들은 성서를 공부하고,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을 익히며 자기 자신에 대하여 명확히 성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께 도달하기 위해서
   한계단, 한 계단 올라가는 완전성을 향한 사다리를 놓은 일이 없다.
   오히려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 겸손이라는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제시하였다.


   아래로부터 영성은 한편 인간이 자신의 참된 모습에 도달하기 위해
   걸어가는 치유 효과를 지닌 길이요,
   다른 한편 실패의 체험을 넘어 기도로 나아가게 하는 길이다.
   "저 아래 깊은 곳에서 구원을 향해 소리치면서"
   하느님과 깊은 관계를 맺어나가도록 인도하는 길이다.


   복음사가들은 베드로의 잘못을 구차하게 변명하거나 감싸지 않았다.
   복음사가들에게는 예수님이 신심이 깊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죄 많고 잘못이 많은 사람들을 사도로 선택한 것을 사실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중요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죄를 통해 다른 사람을 위한 반석이 되었다.
   베드로는 그 자신 스스는 결코 반석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체험했고,
   여러 가지 요소들로 얽혀 있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께 충실하게 머물 수 있기 위해서는
   오직 믿음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덕행과 금욕 또는 자기수련을 통해서는 하느님께 도달할 수 없고,
   오직 자신의 무능을 인정함으로써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예수는 가난한 자, 배고픈 자와 정의를 갈망하는 자, 슬퍼하는 자,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오직 하느님의 은총에만 손을 벌리고 있는 자들을 복된 사람으로 부르고 있다.


   "아바스님은 성서에 대해서는 쉽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분에세 영혼의 고통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그에게 응답을 주십니다."


   자신들이 처해 있는 실재적인 상황에 대하여 언급하는 대화중에
   하느님은 그들에게 직접 다가오셔서 체험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주신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만남으로써 서로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자신의 죄를 인식하는 사람은 기도를 통하여 죽은 자를 일으켜세운 사람보다 더 큰 사람이다.
   한 시간 동안 자기 자신의 부족함에 대하여 신음하고 한탄한 사람이 오히려
   우주에 대하여 가르치는 사람보다 더 큰 사람이다.
   자기 자신이 지닌 약한 부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천사를 보는 사람보다 더 큰 사람이다.
   혼자서 어려움을 못 이겨 고통스러워하면서 이를 악물고 외롭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교회 공동체들의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기뻐하는 사람보다 더 큰 사람이다.(Lafrance)

 

성당에 다니고, 미사 참례하고, 하느님과 예수님의 말씀으로

하느님과 예수님을 만나고 겸손해지는 것으로 착각했다.
겸손한 삶을 끊임없이 노력함으로, 언제나 기다리고 있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겸손은 자신보다 더 뛰어난 능력이나 지위를 가진 사람에 대하여
   그렇지 못한 사람이 가지는 하나의 상대성에서 유발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경험한 인간이

   하느님께 대하여 가지는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자세이다.
   여기서 겸손은 인간이 가진 제한성을 인식하는 것에 근원을 두고 있다.
   인간이 궁극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까지 의미하는 것이다.(Bollnow)

 

   나 자신을 주위의 관심을 끄는 흥미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 나를 중요한 존재로 여기는 것,
   나를 주위의 중심적인 존재로 세우는 것 등을 모두 포기하여 위하여
   나의 진면목을 면전에 두고 보아야 한다.

 

신앙의 위기에 대하여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위기에 빠진 사실로 분노하거나 격정하지 말고,

원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새롭게 나아갈 길을 찾아야겠다.

 

   자신을 순교자 예언자 또는 성인과 같은 전형적인 이상적 존재로
   추앙받는 사람들과 동일시하는 교만한 자는
   흔히 윤리적으로 비참한 처지에 빠져들거나 죄 속에 빠져드는 것과 같은
   아래로 완전히 추락하는 과정을 겪어야만 치유될 수 있다.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우리가 하느님을
   바로 우리의고통, 각종 질병, 상처, 에움길, 무능력 들 속에서 찾는 것을 의미한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한계상황에서

   나는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나를 하느님께 내던져 맡기게 된다.
   내가 하느님께 완전히 항복하는 지점에서,
   내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신이 빠져있는 시궁창에서 도처히 헤어나올 수 없는 한계상황에서,
   내 힘으로는 나를 개선해 나갈 수 없을 때,
   하느님의 개별적이고 인격적인 깊은 새로운 관계가 시작될 수 있다.
   그곳에서 나는 하느님이 누구며 은총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게 된다.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욕구들을 억합하거나 지배하지 않고 변화시키고자 한다.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우리 안에서 욕구들이 일어나는 원인과 그 욕구들이 하고자 하는
   최종적인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물어본다.

 

   나 자신을 변화시고자 하는 모든 노력들에서 나는 언젠가 한번은 지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나를 교만으로 이끌어가는 덕행에 의해서

   하느님 안으로 몰입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 더 이상 어떠한 것도 할 수 없고 어떤 것도 가지지 않은 빈털터리 신세가

   나를 하느님께 전적으로 맡겨드리로고 할 것이다.
   나는 이제 하느님께 나를 맡겨드리는 것말고는

   다른 어떤 가능성도 지니지 못한 상태에 놓인 것이다.
   그러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나는 어떤 업적을 쌍아가는 것을 영성의 핵심으로 삼으려고 하는
   명예욕에서 해방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나를
   먼 옛날 죽은 사람처럼
   어두운 곳에 처넣어 두셨구나.
   무거운 사슬로 묶어 울 안에 가두셨으니
   나 어찌 빠져나갈 수 있겠는가.
   아무리 살려달라고 울부짖어도
   주께서는 이 간구마저 물리치시고,
   도리어 돌담을 쌓아
   앞길을 가로막으시는구나.
   주께서 곰처럼, 숨어 엎드린 사자처럼
   나를 노리시며
   앞길에 가시덤불을 우거지게 하여
   내 몸을 갈가리 찢게 하시고,
   나를 과녁으로 삼아
   화살을 메워 쏘시는구나(애가 3.6-12)

 

   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얼굴에 놓여 있는 모든 가면들을 벗기시고,
   내가 완전한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쌓아올린 담들을 부수어버리신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완전히 벗은 알몸으로 참된 하느님 앞에 서게 되며,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시 일으켜세우게 된다.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많이 가진 소외된 자들은 공동체 안에서

   예언자적 역할을 수행해 나가고 있다.
   그들은 진실성을 요구함으로써 공동체를 흔들어 자극한다.
   많고많은 공동체들이 이상들과 좋은 말들을 실현할 것을 목표로 하여 건립되었다.
   그러한 공동체들에 소속된 사람들은 언제나 반복하여
   사랑, 진리 그리고 평화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한다.
   그러나 소외된 자들은 이들이 발설하는 많은 좋은 말들 중 상당 부분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느낀다.

   병자들, 소외된 자들, 불편함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자들 그리고 불평을 늘어놓는 자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애기를 들으면서 관심을 보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것이 아래로부터의 영성이다.

   아프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한 형제들에 대하여
   더 큰 사랑으로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돌보는 것은
   그리스도적 공동체가 마땅히 취해야 하는 기본적인 자세이다.

 

유머가 부족했다. 웃고 넘길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과로가 원인이다.
이제 그렇게 봉사하는 일을 맡지 않을 것이다.
형식적인 요소와 덕행으로 나를 압박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의 아픔을 듣고, 나의 아픔도 이야기하는 생활을 할 것이다.

 

   유머는 우리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고 그것과 화해하게 하는 반면,
   이상주의는 우리의 실제적인 삶의 현장으로부터 도망쳐서 이상주의 안으로 숨어들게 한다.

 

   웃으면서 자신의 잘못을 보는 사람, 
   자신이 알게 모르게 여러 가지 부정적인 요소들에도 연계되어 있는 것을 인식하면서
   그것을 웃음으로 지켜보는 사람은 유머의 세계를 이해하고 유머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사람이다.
    이 두 경우의 사람들은 세상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예리하게 인식하는 사람이며,
   그러한 세상에 대하여 무시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차갑게 대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러한 모든 부정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지닌 신비에 감탄하며 사랑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불안전한 세상이 어떤 형태로든 하여간 질서 속에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믿음을 가지고 있다.

 

   영성적으로 상당히 진보한 사람이 언제난 다시 겸손에 대해 말하는 것은

   결토 과장된 행위가 아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겸손한 자세를 통해 가능함을 체험한 것이다.

 

   겸손한 사람은 형제와 자매를 멸시하지 않고 그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본다.
   그러므로 겸손한 자세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지닌 신비에 대해 경건한 태도를 지니며,
   마음 안에 다른 형제자매들을 위한 큰 여유 공간을 지니고 있다.
   자기 자신의 인간성을 만나본 사람은 다른 모든 인강성에 대하여 친숙함을 느낀다.
   겸손한 사람은 그가 만나게 되는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여 받아들이며,
   특히 연약한 사람과 아픈 사람, 불안전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싸안는다.

 

   하느님의 음성을 그들 자신의 마음과 그들 삶의 고통에서,
   그들의 느낌과 꿈 안에서, 그들의 육체 안에서 듣고 이해하여 실천해 나가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제 이들은 자신들을 꽉 조여 압박하는 옷을 벗어버려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느님께서 그들 안에 만들어놓으신

   그들의 원래 모습을 꽃피워 나갈 수 있을 것이다.

    - 본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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