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 정혜자
팔순을 훌쩍 넘겨
예고 없이 찾아든 치매
여든 여덟 해를 살아오며
남에게 싫은 소리 듣지 않고
참말로 선하게 사셨던 할아버지
밥 안주는 며느리를 고발하러
경찰서에 가셨다가 쫓겨오고,
칠십 년 살았던 고향을 못 잊어
매일 꿈속을 걸으시던 할아버지
시아버지의 마지막을 느낀 큰며느리는
이발도 해드리고 수염도 깎아드리고.
'아버지, 삼월삼짇날 가시다.
지금은 가시지 말고....'
'오냐, 내 그러마'
비바람이 무섭게 흩어지던 날
할아버지는
음력 삼월 초나흘에 먼 길을 떠나셨다.
착한 며느리와의 약속을
마지막 할 일로 끝을 맺으신 것이다.
해마다 삼월삼짇날은 할아버지 제삿날
콩나물을 다듬던 할머니의 손에
허한 바람이 스쳐 지나면
말라버린 눈물이
다시금 얼룩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