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와 함께하는 초기불교 산책1 | 김재성 저 | 한언 | 2010.03.20
불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여러 책을 읽었다.
그리고 초기 불교에 대하여 궁금했다.
먼저 도올 김용옥 선생님의 EBS특강 인도를 만나다 동영상 강의를 들었다.
강의 노트를 만들었는데 그만 잃어버리고,
초기 불교에 대한 서적을 검색하다가 이 책을 찾았다.
초기불교 산책2가 궁금하고 빨리 읽고 싶다.
다음은 책 속에 나오는 내용이다.
우리가 불교를 배우는 이유를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인생의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가르치는 것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뿐이다.
부처님이 출가한 이유에 대해 "선(善)을 구하기 위해서 출가한다"라고 전합니다.
선이라는 것은 최상의 행복,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을 가르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왕자는 늙음과 병과 죽음으로부터,
즉 삶의 총계적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 완전한 행복을 찾고자 출가한 것입니다.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자신의 완성을 위한 지혜와,
모든 중생이 행복해지고 평안해지길 바라는 자비심이라는 2가지 덕목은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에 해당합니다.
고행은 몸을 괴롭혀서 정신적인 성숙을 얻으려고 하는 것인 반면,
부처님의 두타행은 몸을 괴롭힌다기보다 몸이나 의식주에 대한 욕망을 극복하면서
내적인 정화를 이루려는 수행법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두타행은 스님들이 실천하는 자발적 가난의 생활방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을 일러 일체지자(一切智者), 즉 '모든 것을 아는 분'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그 일체지 안에는 수없이 많은 지식이나 지혜들이 있는데,
부처님께선 그중에서도 제자들에게 가장 유익하고 청정한 삶에 도달할 수 있는
가르침만 설하신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4가지 고귀한 진리인 사성제란 뜻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면 반드시 괴로움은 소멸된다는 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마지막으로 올바른 실천에 의해서 괴로움의 소멸이 가능하다는 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인 팔정도에 대한 가르침이지요.
우리가 따라야 하는 수행의 덕목이란 다름 아닌 지혜의 완성과 자비의 실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계를 지키고 선정 수행을 닦아서 그 선정을 바탕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으로써 지혜의 완성은 이루어집니다.
지혜가 완성되면 더 이상 생겨났다 사라지는 현상들에 매달리거나 집착하거나 화를 내는 일이 없어집니다.
그러다 궁극에 가서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완전히 끊어져서 평온하고 행복한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계정혜 삼학을 닦아 해탈을 이룬 아라한들은 그냥 가만히 있지 않고 끊임없이 해탈의 즐거움을 느끼면서
그 즐거움을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비의 실천이지요.
인생의 근본적인 사실이 괴로움임을 분명하게 제시하며,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서 획득할 수 있는 자유를 다루는 4가지 고귀한 진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 인생의 괴로운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그러한 괴로움엔 원인이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며,
선정과 지혜의 수행을 통해서 그러한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되어 완전한 자유와 열반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보여주는 것이 법입니다.
오계(五戒)의 첫 번째는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겠다는 것(不殺生)아고
두 번째는 주지 않는 것을 취하지 않겠다는 것(不偸盜)입니다.
세 번째는 잘못된 음행을 하지 않겠다는 것(不邪淫)이고,
네 번째는 잘못된 말을 하지 않겠다는 것(不妄語),
다섯 번째는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곡주나 과일주를 마시지 않겠다는 것(不飮酒)입니다.
사성제(四聖諦)-고(苦)집(集)멸(滅)도(道)
괴로움의 고귀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이 윤회의 굴레에서 혜매야만 했다.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고귀한 진리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고귀한 진리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고귀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깨달지 못했기에 나와 그대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이 윤회의 굴레에서 헤매야만 했다.
이렇듯 불교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운명을 만들어왔고,
지금도 앞으로도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즉 나의 행위에 의해서 내 삶이 결정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행위(원인)와 결과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무인과론(無因果論)을 부정하는 동시에
숙명론과 같은 완벽한 인과론 또한 부정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과거에 행한 행위가 지금의 삶을 결정하고 있지만
현재의 행위들은 다음 생 혹은 다음 순간을 결정하므로 수행을 강조합니다.
더 나은 삶을 만들 수 없어 주어진 운명대로 산다면 부처님 말씀을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짓는 업에 따라 좋은 결과도 있고 나쁜 결과도 있으니
좋은 업을 지어서 행복한 인생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좋ㅇㄴ 업으 짓는 데도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조건 없이 좋은 업을 지어야 한다는 겁니다.
좋은 업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거지요.
이것이 바로 불교이 궁극적인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수행을 해도 그 수행에 묶여 있다면 수행은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옳은 것을 행한 후 내려놓으라고 말합니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고귀한 진리란 무엇인가?
태어남은 괴로움이며, 늙음도 괴로움이며, 병듦도 괴로움이며, 죽음도 괴로움이다.
슬픔, 비탄, 통증, 비애 그리고 절망도 괴로움이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고,
싫어하는 대상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며,
좋아하는 대상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간단히 말하면 인간을 구성하는 5가지 무더기에 대한 집착이 괴로움이다."
이렇듯 어느 곳에 태어나는가는 업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실제로 우리를 낳아준 부모는 조연자일뿐이고
주연은 자기 업이라고 말할 수 있기에 우리는 업의 상속자라고 말합니다.
나는 내가 지은 업의 자식이라는 뜻이지요.
진정으로 삶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죽음에 대해 늘 생각하고 있어야 됩니다.
'죽기 전에 내가 반드시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인생에서 내가 갖춰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등등
죽음의 시점은 가장 불확실한 것이지만 반드시 죽는다는 측면에서는
가장 확실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평소에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휠씬 여유를 가질 수 있겠지요.
죽음이 또 하나의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도록 삶 속에서 늘 수행하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죽음에 임박한 순간에도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기원합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힘으로 천상 세계에 태어날 수 있는 선업을 쌓을 수 있습니다.
매일 사건이 날 때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바라는 마음을 반복해서 일으키다 보면
그 힘을 곧 느끼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처해 있는 곳에서 마음을 닦지 않으면 어디에서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5가지 무더기에 대한 집착을 우린 오취온고(五取蘊苦)라고 말합니다.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라는 오온에 대한 집착이 바로 괴로움이라는 말이지요.
그 모든 것들이 물질적인 요소로 이루어졌다는 측면에서 지(地), 수(水), 화(火), 풍(風)에 해당하고,
그 사대는 '자아'나 '나'라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것들은 조건이 있어서 생겨났고 조건이 없으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몸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도 입증되었습니다.
우리 몸의 세포는 6개월이 지나면 완전히 새로운 세포로 교체된다고 합니다.
변하지 않는 나라는 것은 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처럼 끊임없이 변하는 우리 몸은 결코 만족스럽고 편한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 의지 작용을 중시해서 의지 작용이 바로 업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카르마(karma), 즉 업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의지 작용, 즉 행을 뜻한다는 말이지요.
이처럼 행과 업은 서로 겹치기도 하지만,
행이 더 넓은 뜻으로 사용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대상(*색)을 보았을 때 시각 기능이 살아있고, 대상이 있으며,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면 대상에 대한 인식(*식)이 일어납니다.
그 대상을 알아보는 식이 일어나는 거지요.
그러면서 좋다, 싫다, 좋지도 싫지도 않다는(*수) 3가지 느낌 가운데 한 가지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느낌이 일어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대상에 대한 지각이나 판단 또는 관념이 일어납니다.
이때의 느낌이 수온이고 지각이나 판단, 관념 등은 상온에 해당합니다.
또 그러한 느낌, 지각, 판단, 관념 같은 것이 일어나면서 대상에 대해 어떻게 하고 싶다는 의지 작용,
즉 행온도 발생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에는 오온, 즉 색, 수, 상, 행, 식도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남방불교에 의하면 그런 후 업의 힘에 의해서 내생의 존재 방식이 바로 결정되지요.
이는 곧 죽음의 순간과 태어남이 순간이 바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의식이 순간 순간 이어지듯이 죽음의 순간과 태어남의 순간이 맞붙어서
새로운 오온이 바로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육체, 내 느낌, 내 지각, 내 의지, 내 의식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오온 자체를 '나'라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이런 생각이 어리석은 것이라는 말이지요.
이 몸이 영원한 자아와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런 인간에 대한 무지를 극복해주기 위해서 부처님은 오온에 대해 가르쳐주셨습니다.
생로병사의 괴로움은 실제 세계 전체를 이루고 있는 이 5가지 무더기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이현상들로부터 어쩔 수 없이 경험하게 되는 괴로움도 있겠지만,
결국엔 오온이 '나'라고 집착하는 데서 일어나는 괴로움이 근원이 됩니다.
물거품들을 바라보고 있다고 하자.
그는 물거품을 살피면서 아주 주의 깊게 검토하고 있었다.
주의 깊게 검토해보니 그 물방울들은 비어 있는 것,
실재하지 않는 것, 견고하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주의 깊게 검토해보니 이 5가지 무더기들이 비어 있는 것, 실재하지 않는 것,
견고하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놓쳐버리면 바로 그때 일어난 마음이 우리를 장악합니다.
무상하고 텅 비어 있고 실체가 아닌 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로보면
마음이 날뛰지 못하게 제어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부리며 살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의 힘이 될 테지요.
그런 힘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우리이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눈으로 무엇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는 것을 즐기고 삽니다.
하지만 이런 감각적인 쾌락은 괴로움의 바탕이자 괴로움 그 자체가 됩니다.
반면 성인들은 오온은 즐길 만한 것이 아니라 괴로운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살아가지요.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철저하게 관찰함으로써 거기에 휘말려들지 않고 자유롭게 사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오온인 마음과 몸이 하는 일인데, 내가 과연 이 속에서 무엇을 즐기고 있는가?',
'무엇을 찾고 무엇을 바라는가?'하고 끊임없이 성찰한다면 많은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열심히 살아도 무상한데, 열심히 살지 않으면 더욱 빨리 무상하게 흘러갑니다.
그뿐일까요? 끊임없이 잘못된 행위를 통해서 괴로움의 씨앗을 뿌리며 살게 됩니다.
괴로움의 씨앗이 뿌러지면 나중에 겪는 것은 고통밖에 없겠지요.
오온이란 끊임없이 변하고 불만족스럽고 안정되지 못한 것이라고,
그러한 오온에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괴로움의 씨앗을 더 이상 뿌리지 않고, 오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 오온에 대한 집착과 분노를 덜어내고,
끊임없이 오온을 다스리며 살아갈 수 있으면 우리는 점점 자유로워집니다.
점점 안정되고 점차 행복해집니다.
오온의 보편적 특성, 삼법인
"형성된 것은 모두 무상하다(提行無常). 형성된 것은 모두 괴로움이다(一切皆苦).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실체가 없다(諸法無我)."
우리가 사는 세계 전체가 바로 조건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조건이 사라지면 우리의 세계 또한 없어져버린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것들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귀로 들리는 것,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을 느끼는 것들은 모두 다 조건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평범한 우리 인간들이 경험하는 모든 세계의 대상들,
심지어는 경험하는 마음들까지도 모두 조건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들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 제행무상의 진리입니다.
무상한 우리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서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킬 때 우리는 비로소 그처럼 청정한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조건에 의해서 생겨났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불만족스럽고 편안하지 않으며 안주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본래부터 불만족스럽고 편안하지 않은 것임을 지혜에 의해서 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인생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직시하게 하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반은 조건에 의해 생겨난 법(有爲法)이 아닙니다.
즉 무위법(無爲法: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닌 법)입니다.
열반은 내가 얻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가 있어서 그 존재가 열반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것이 다 사라질 때,
우리 몸과 마음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현상이 모두 소멸될때, 그것을 열반이라고 합니다.
윤회(samsara)
'끊임없이 헤맴'
윤회라는 것은 순간순간 변하는 오온의 결합이 헤아릴 수 없는 때부터 끊어짐 없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윤회는 부처님 당시나 불교의 전 역사에서 매우 기본적으로 인정해야 할 진리입니다.
지금 나를 나라고 부르게 하는 오온 전체, 즉 육체적인 조건과 정신적인 조건들이 결합된 5가지 무더기가
어떤 업의 힘에 의해서 이어진다고 설명하지요.
이처럼 우리는 윤회라는 것을 끊임없이 변화하고 불만족스러우며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는 무아설에 근거를 둔 채 이해해야 합니다.
"비구들이여! 생각해보라. 어떤 것이 더 많은가를! 이 생사의 세계에서 이리저리 헤매며 싫어하는 대상과 만나고 좋아하는 대상과
헤어지면서 슬픔 때문에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과, 저 사해(四海)의 바닷물 중 어떤 것이 더 많은가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오랫동안
생사를 거듭하면서 부모, 아들, 딸, 형제, 자매와 사별 때문에 괴로워했다.
이처럼 이 생사의 세계에서 이리저리 헤매며 삶과죽음을 되풀이하면서 싫어하는 대상과 만나고 좋아하는 대상과 헤어지면서
슬픔 때문에 울부짖으며 흘리 눈물이 더 많지 저 사행의 바닷물이 더 많지는 않다."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우리가 윤회를 했으면 우리가 흘린 눈물과 피가 저 바닷물보다 많다고 하셨을까요?
우리가 살아오면서 선행보다 악행을 짓기가 더 쉽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어렵지만 인간답게 사는 것도 쉽지는 않지요?
끊임없이 우리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을 통해 실생활에서 무상과 고, 무아를 관찰할때,
원하지 않는 상황에 맞닥뜨리더라도 그것에 휘말리지 않게 됩니다.
듣기 싫은 소리뿐 아니라 칭찬하는 말에도 마음이 우쭐해지거나 들뜨지 않게 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것이거나,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이거나, 거친 것이거나 미세한 것이거나,
저열한 것이거나 뛰어난 것이거나, 긴 것이나 짧은 것이거나 물질적 현상에 대해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있는 그대로 알고 보아야 한다."
오온에 대한 무지가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바로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무심코 흘러 보내면서 그저 '나의 몸'이라고 생각한다면 육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행한 선행마저 버릴 수 있는 마음은 불교에서 말하는 회향으로 직결됩니다.
회향이란 자신의 선행이나 수행으로 얻은 공덕을 다른 존재들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눈으로 어떤 대상을 볼 때,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코로 냄새를 맡을 때, 혀로 맛을 볼 때,
몸으로 감촉을 느깔 때, 마음으로 그 대상을 생각할 때, 그 대상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거나 즐길 만한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갈애가 생겨나고 그곳에서 머무른다는 뜻입니다.
이 처럼 갈애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이는 곧 괴로움의 원인이 바로 우리 안에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가 이토록 괴로운 원인이 무엇이지?' '도대체 뭐가 문제야?' 하고 찾지 마십시오.
눈으로 대상을 볼 때 바로 그 눈에서 대상에 대한 갈망이 일어나고,
귀로 소리를 들을 때 바로 그 귀에서 소리에 대한 갈망이 일어납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서 떠오른 생각에 대한 갈망이 일어납니다.
이 모두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우리가 탐심과 진심과 치심에 둘러싸인 이유는 몸에 대한 마음챙김이 없기 때문입니다.
몸에 대한 마음챙김, 걷고 서고 앉고 누울 때의 동작에 대한 마음챙김,
세부적인 동작에 대한 마음챙김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대를 통해 몸을 분석하여 알아차리지 못하고,
부정관 수행을 통해 우리 몸이 얼마나 무상하고 괴로운 것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감각적 욕망이 마음에서 일어났다 사라지면 별로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감각적 욕망에 휘둘러서 마음의 주인자리를 내줍니다.
그리고 그 욕망이 시키는 대로 몸과 입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모든 중생은 자신이 한 행위의 소유자이며, 행위의 상속자이고,
행위로부터 태어났으며, 행위에 묶여 있고, 행위를 피난처로 하고 있다.
선한 행위나 악한 행위나 그 어떤 행위라 하더라도 그 행위의 상속자가 된다.'
우리의 잠재적인 성향뿐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행복과 불행이 우리 자신의 업에서 생겨난 것임을 설명해줍니다.
우리가 이렇게 태어난 이유는 자신의 몸과 입과 마음에서 행한 여러 가지 행위들 때문입니다.
"대해도 말라버려 물 한 방울도 남지 않은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이 대지도 불에 타버려 파괴되어 온전히 사라져버릴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어리석음에 가린 채 갈애에 빠져 생사의 굴레에서 이리저리 바쁘게 헤매는 중생들의 괴로움은 다할 날이 없을 것이다."
"어떤 곳이든지 생명이 태어나는 곳에서는 그들의 행위가 결실을 맺는다.
행위가 결실을 맺는 곳에서는 어떤 곳이든지 그 행위의 결과를 맛보게 될 것이다.
그때가 현재가 되건 바로 다음 생이 되건 미래 생이 되건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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