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이야기

홀로 하느님과 함께 (사막의 영성)

bike 2008. 6. 10. 11:44

'홀로 하느님과 함께(사막의 영성)'를 읽고 
- 에티엔 슈느비에르 지음 | 김좌동 옮김 | 바오로딸 | 2005

- 은수자(隱修者)는 숨어서 도를 닦는 사람을 말한다.
  이 책은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내면 활동과 관련된 은수자의 삶에 관한 것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그분이 기다리고 계시는 황폐한 사막으로 들어갈 것을 권하고 있다.

 


'홀로' '영성'이라는 낱말로 책을 선택했는데,
은수자의 삶에 대한 책이다.
세속에 마냥 녹아 살아가는 나의 삶인데..., 그냥 은수자의 삶을 느껴본다.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루카 18,19)
하느님을 믿을 수 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좋은 말씀이 많이 나온다.
좋은 말씀을 찾아 책을 읽는데, 그 좋은 말씀은 바로 성경에 나오는 말씀이다.
매일 성경 읽는 것을 중단했는데, 이제 다시 시작해야겠다.
조금 천천히 조금 더 깊이 읽을 생각이다.


어떻게 행동할 인가?
가끔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지 못할때가 있다.
답을 가르쳐준다.
나 자신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행동할까?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 계시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 질문의 답을 그대로 행동하면 된다.
예수님 처럼,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기에.

 


하느님은 당신 피조물 안에서 반복되는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황량한 사막으로 들어가십시오. 하느님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삶을 구상하지 말고, 하느님의 섭리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십시오.
좋고 싫음은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유연하고 온순해지도록 하십시오.


은둔지가 도저히 참지 못할 정도로 불편하더라도 행복해하십시오.
시간 절약, 수익을 우선시 하는 것, 자유로운 정신은 변명거리일 뿐입니다.
은수자는 혼잡한 세계에 삶의 리듬을 맞추지 않습니다.
그분의 가치척도는 세상과 다릅니다.
그대는 영원성을 마음의 양식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대는 주님의 계율에 복종하며 투쟁할 것입니다.
이 계율이 가혹한 시련으로 보일지라도 그대를 정화하여 평화롭게 할 것입니다.
갖가지 형태를 띤 자애심을 철저히 단절시켜 그대 스스로 세운
자연적이고  초자연적인 모든 가치 체계를 이루며
조화롭게 되는 것은 바로 이 계율에 의해서입니다.
이처럼 정돈된 상태가 평온을 보장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보시오." (마태 4,6)
이에 대한 겸손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곧 "나는 위에 있지 않으므로 아래로 몸을 던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디 있는 힘껏 틈틈이 간절한 소망으로 하느님과 일치되기를 바랍니다.
그대의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신비의 기도는 그리스도인이자 은수자인 그대의 소명입니다.
은총을 바라십시오.
대답이 늦어지거나 거절당하더라도 평온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이십시오.
하느님께서 어느 때 은총을 베풀실지 알 수 없으니 항상 그 은총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십시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당신의 '등뒤로'로 던져버리셨습니다.(이사 38,17)
그 죄가 그분의 기억 속에서 다시 살아나지 않습니다.


지나간 과오가 나의 기를 꺽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잃어버린 순수성을 되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용서해 주십니다.
그분은 더러움까지도 말소시켜 당신의 완전무결한 능력으로
처음의 아름다움을 회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저지른 죄를 뉘우치십시오.
그러면 그대를 가득 채웠던 육체의 향락을 증오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대 마음속 깊이 숨겨진 어두운 부분까지 보고 계십니다.
그대 자신보다도 더 분명하게 말입니다.
그분이 심판하시도록 모든 것을 내맡기십시오.


바오로 서간을 읽고 또 읽으십시오.
각 서간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호의로,
당신의 은총이 얼마나 엄청나게 풍성한 지를"(에폐 2,7) 알게 합니다.


그대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열정이 부족합니다.
관대하지 못함을 고백하십시오.
그럼에도 그대는 사막에서 오직 한 가지만을 끈기있게 밀고 나가십시오.
사막은 그대에게 어떤 인간적인 흥미도 주지 않으며
그대를 지치게 만드는 온갖 어려움으로 가득합니다.
오직 한 가지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대의 마음이 순결하고 정신이 깨어 있다면 밤도 낮처럼 빛날 것이고(시편 139,12)
밤을 하느님의 손짓이 남긴 흔적처럼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빈 공간으로 창조된 밤은 장엄하고 감동적인 기억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아직도 새벽이 오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면,
그 희망이 신앙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으로 그대는 하느님의 증인이 되며,
그대의 재능이나 행복한 삶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언약으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의 선물은 거저 주어진다는 확신을 뼛속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대는 자신만을 신뢰하려는 유혹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압착지로 짜내야 합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보살핌보다 이웃의 도움에 더욱 마음을 쏟고,
영광스런 주님의 승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선행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이루는 일치조차 그분께 대한 응답이 아닌 개인의 완성으로 보려고 합니다.
하느님 앞에 '무(無)'가 아니라 그분이 바라보아야 할 '누군가'로 있으려 하는
인간의 잘못된 판단이 하느님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게 했습니다.


통회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머지않아 생기를 잃어버리고
이기적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대가 하느님과 똑같이 설계하는 것은 무례한 짓입니다.
그분과 말할 때 주도권은 그대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모든 것이고 그대가 아무것도 아닐 때
그대는 행복합니다.


이루 형언할 수 없고 우리의 이해 밖에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은
그대 영혼에 깊은 고요를 허락하시며 모든 쓸데없는 호기심을 없애주실 것입니다.
이러저러한 말로 복잡하게 분석하는 것을 단념한다면,
지적 노력이나 환영 또는 특별한 즐거움이
그대를 하느님과 하나 되도록 이끄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에 대하서는 눈을 감고
하느님께 더 많은 축복을 내려달라고 요구합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우리의 더러움을 감추는 겉옷자락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씻겨져 회복되고 순결함 속에서 다시 나야 합니다.
단순하고 꾸밈없는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이 한 영혼에게 드러날 때
모든 피조물의 빛은 퇴색합니다.
반사된 피조물의 형상은 더이상 매혹적이지 않습니다.


그대가 홀로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과 닮은 꼴리 되기 위해서는
완전한 포기 과정을 피할 수 없습니다.
틀림없이 점진적으로 그대는 그분처럼 생각하고 그분처럼 판단하며,
그분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그분의 의도가 될 그분의 의도 속에서 그분의 방식대로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온전히 자신을 버리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대 안에 그분이 머물게 하고 성부의 마음에 들게 하십시오.
다시 말해 자신 안에 예수님의 영혼이 생기를 띠는 사람만이 아들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자아'를 버리고 '모든 것을 단념하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분만으로 만족하십시오.
예수님은 그대의 신뢰를 소중히 여기십니다.
아무도 그대를 그분보다 더 잘 이해하지 못하며
그분처럼 위로해 주거나 도와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대는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그대의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힘들 때도 있겠지만 그대는 "젖먹이 아이처럼 팔에 안겨다니며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을 것입니다." (이사 66,12)


'가난'은 고독이요, 침묵이요, 버림입니다.
가난은 마음의 순결함이고 모든 소유물과 하느님이 주시는 감미로운 혜택조차 벗어 던진 상태입니다.
메마르고 캄캄하고 황량한 곳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아무도 모르게 사랑하는 그분을 위하여 겪는 것이며
그분만을 기다리고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지체들이 이 수난을 받아들이기를 바라십니다.
주목하십시오.
세례를 받음으로써 모든 성사를 통해 십자가가 그대의 육체와 영혼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속내 이야기를 함으로써 동정받는 것은 인간적인 위안일 뿐,
이런 것들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사소한 것이라도 받아들이고 봉헌하는 내적 태도만이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성서를 읽으십시오.
그대의 유식함은 오히려 마음을 메마르게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는 가난한 사람들과 약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시편 74,21)
이러한 사람들에게 머물 곳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시편 68, 11)


일에 대해 미리 걱정하지 말고, 흠 없는 정신 상태를 간직하십시오.
하느님을 뒷전으로 몰아놓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요 마리아는 촛대입니다.
예수님은 만나요 마리아는 그것을 담는 단지입니다.
예수님은 유향이요 마리아는 그것을 태우는 향로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요 마리아는 그것을 나눠주는 식탁입니다.


생활이 간소하고 일이 단순할수록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수월합니다.
나자렛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어머니, 하늘과 땅의 여왕이셨지만 초라한 한 가정의 살림꾼이었고
일상의 삶이 마을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하느님이 그들의 하느님이고,
그들의 이상이 그대의 이상입니다.
같은 은총이 그대에게 힘을 주고, 같은 성령이 그대의 생명에 활기를 줍니다.
그대는 똑같은 마음으로 같은 미사에 참석하며 똑같은 성체를 받아모십니다.
그대는 똑같은 주님의 기도를 외우고 같은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을 어떠한 장소나 공간에서 찾지 마십시오.
눈을 감고 그대의 마음 깊숙이 들어가십시오.
그대의 몸은 거룩한 삼위일체가 머무는 거룩한 곳입니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소란 가득한 세상은 하느님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대는 홀로 있을 때 황홀하게도 결코 혼자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 본문에서

 


나는 그들에게서 나이 얼굴을 감추고
그들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리라. (신명 32,20)

 

그분께서는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30)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5,16)

 

하느님의 사랑은 깊은 감동을 느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함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분을 위해 고통을 받는 데 있다. (잠언 56)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 2,20)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1요한 4,16)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입니다. (필리 1,21)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당신의 한없는 인내로 대해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1티모 1,15-16)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마태 6,6)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1코린 3,16)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2코린 6,16)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합니다. (1코린 1,25)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여한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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