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이야기

예수와 만난 사람들

bike 2008. 5. 23. 11:15

- 이현주 | 홍성담 판화 | 생활성서사 | 1986.5.24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면서 새롭게 의미를 가져본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의 죄 때문에 나 자신이 죽은 것이다.

더 낮은 곳으로 가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용서가 무척이 어렵다. 어떻게 보면, 용서도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하기도 부족한 시간인데, 먼저 용서하고 싶다..

주일학교 교사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성경의 중요한 부분을 사건 속으로 들어가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돌아갈 집이 없는 대신 찾아갈 집이 가는 데마다 있었다.
그는 흐르는 물과 같았다.
자기보다 더 낮은 곳이 있으면 시각을 다투어 그리로 내려갔다.
그리하여 언제나 그는 맨 아래에 있었다.


무엇을 그리 움켜잡고 있었는가?
불쌍하게도! 놓아 버려, 모두 놓아 버리는 거야.
그리고 하늘이 주신 대로 살아가게.
그순간 우리를 떠났던 것들이 모두 돌아온다네.
이게 바로 세상 사는 맛이지! 허허허...


사람들이 그대를 물건처럼 취급하거든 그대는 그들을 천사처럼 받들구려.
사람은 남이 만들어 주는 대로 정해지는 게 아니라 자신이 만드는 대로 정해지는 법이오.


무엇을 먹고 살까? 무엇을 입을까?
그렇게도 걱정만 되던 것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 갔고,
나에게는 알 수 없는 용기와 자신감이 샘물처럼 솟구쳐 올랐다.
절망의 깜깜한 끝가지에 매달려 온몸으로
그분의 이름을 볼러 본 사람은 내 이제 더 무슨 말 아니해도
이 가슴 벅찬 감격을 더불어 나눌 수 있으리라.


'그날'은 누구에게나 있다.
지금 혼자만의 아픔으로 가슴 졸이며 우는 사람아, 너에게도 그날은 있다.
지금 터무니없는 비극 속에 홀로 빠져 있어 푸른 하늘 눈 부신 태양이 오히려 더욱 슬픈 사람아,
너에게도 반드시 그날은 있다.
너의 아픔으로 하여금 거대한 위로의 노래가 되게하고,
너의 슬픔으로 하여금 기쁨의 분수로 솟구치게 하는, 너의 그날은 반드시 있다.


나는 아직 한 번도 나의 능력으로 무슨 기적을 행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일을 시작하신 분은 아버지이십니다.
나는 다만 그분의 일을 도와 드리는 손발이요 증언자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하필이면 세리나 죄인과 어울리느냐고 나에게 항의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르고 하는 소리요!
의사는 건강한 사함들한테 필요한 게 아니라 앓는 사람에게 필요한 법입니다.
스스로 건강하다는 자들에게 나는 볼 일이 없어요.
하느님 아버지가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의인을 불러다가 끼리끼리 재미 보라는 게 아니고
죄인들을 불러 의인으로 고쳐 놓으라는 분부셨습니다.
나는 그 명령을 받고 와서 지금 그대로 하는 중이외다.
자기가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모두 나와 상관없으니 가서 볼일들이나 보시오.
나는 당신들이 버린 쓰레기 인생들 곁으로 가겠소.
세상이 이 모양으로 불공평해서야 어디 쓰겠습니까?


어디서 그런 능력을 얻었는지는 모르나 온갖 귀신 들린 자들을 성한 사람으로 고쳐 주고
몇십 년씩 앓던 고질병도 고쳐 준다고 했다.


오랫동안 고생했소. 형제여! 난 벌써 오래전에 당신을 용서했소.
이제는 안심하시오.
그러나 두 번 다시 나를 모르는 척하여 슬프게 하지는 말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중 그 제일가는 일은 용서하는 일인 것 같다.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다.


어느 날 나의 곁으로 오시어 나를 용서해 준 그 사람은

모든 버린 자들을 용서하기 위하여 버림을 받았고,
모든 살인자들을 용서하기 위하여 죽임을 당했고,
모든 의인을 용서하기 위하여 스스로 죄인이 되었던가?


당신이 낫기를 바란다면, 그걸로 충분하오!
그렇다. 그분의 말대로였다. 문제는 나에게 38년이나, 일어서겠노라는 간절한 소망,
그것 없이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는 뜨거운 온몸의 소망,
목숨과도 바꿀 수 있을 만한 애끓는 소망이 없었다는 데 있었다.
주어진 비극과 절망의 상황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고 기껏 한다는 게
지나쳐 가는 사람들의 도움을 기대할 뿐인 나 자신이 문제였다.


명석한 두뇌와 좋은 가문 덕분에 공부를 하여 율법의 박사가 되고
바리사이의 옷을 걸치고 회당의 주인 노릇을 하고
주야로 하느님의 말씀을 암송한들, 그 모든 것이 다 무엇인가?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치시오.


죽음이었다.
그렇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 죽음 말고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죽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또한 여전히 죽어 있는 것이었다.
사람이 살아 있으면서 어찌 그렇 수 있겠는가?


나한테도 재산은 없고 그럴듯한 학식도 없어요.
있는 자들, 강한 자들의 시대는 바야흐로 저물고 있소.
보시오. 이제는 없는 자들, 약한 자들의 손으로 아름다운 하늘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오.
그 모습이 내 눈에 저토록 확실하다오.
우리는 서로를 믿어야 해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소유한 사람은 부자가 아니다.
그러나 일용하고도 남을 재물을 소유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부자다.
그가 일용한 양식 말고 덤으로 지니고 있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일용할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만 할 어떤 일이 따로 있을까요?
있지요. 당신들의 내장을 비워 하느님의 영을 모시는 겁니다.


어째서 인간들은 서로 사랑하며 감싸 주며 살아가는 일보다
서로 미워하고 죽이는 일에 저토록 몰두할 수가 있는 걸까?


아버지, 이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 사람들은 지금 자기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가 숨을 멈추었을 때 죽었던 천지는 비로소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어왔고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그러나 그 순간 죽은 것은 나무에 달린 그 사내가 아니라,
매를 맞아 퉁퉁 부은 얼굴로 죽어 간 그 사내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나를 비롯한 온 세상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를 나무에 달아 죽임으로써
자신을 죽여 버린 살인자요 또한 사형수였다.


증오와 저주 대신 용서를 빌었던 그 사람!
참으로 그는 최후의 승리자였고,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역사의 종착점에 이미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자기 앞에 놓인 빵을 떼어 우리에게 나눠 주며 말했다.
"아버지가 나누라고 주신 빵입니다.
지금도 이 빵을 먹지 못해 굶고 있는 형제들이 있지요.
사람들이 굶주리는 것은 빵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있는 빵을 나누지 않기 때문이지요.
빵을 나누지 않으면 독약과 같은 것,
혼자서 먹으면 그 때문에 자기도 죽고 남도 죽습니다."
- 본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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