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 그 축복의 시간(내면여행으로의 초대)'을 읽고
- 지은이 마리 헬레나 | 출판일 2005년 2월 2일 | 출판사 성바오로
최근에 외롭고 고독함을 느낀다.
따뜻한 커피와 함께 이 책을 읽는다.
달콤한 커피는 금새 빈 컵으로 남는다.
외로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시작이라고 한다.
아직 더 외로운 길로 가야하고, 더 바닥으로 내려가야 될 것 같다.
이제까지는 자신의 열심하고 갸륵한 행동 덕분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가장 가치 없고 비겁하다고까지 느끼는 지금의 자신을 더욱 사랑하시는 그분을 보고,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행위를 보아서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사랑하심을 깨닫는다.
자기 힘이 다해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할 때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신비이다.
그야말로 죽기 일보 직전에 하느님을 만나는 셈이다.
당신을 위해 죽을 때까지 힘을 다해 일한 자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보상은 바로 이것이다.
이렇듯 말 못할 외로운 고통을 당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그런데도 천사는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라고 말했다.
어떻게 이러한 불운의 고통이 은총의 가득함과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적어도 고통과 은총이 비례함을 볼 수 있다.
성모님은 이를 잘 깨달아서 고통을 기도로 감싸고,
고통의 힘을 통해 자신의 온 에너지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기도의 향기로 올라가도록 했다.
스스로 한이 많다면 우리도 성모님처럼 '은총이 가득한 자'이다.
남은 일은 성모님처럼 기도를 가지고 고통을 진주로 바꾸는 것뿐이다.
하느님은 내가 태어난 것부터 죽을 때까지 길을 알고 계신다.
그 길을 어떻게 가야하는지 결정하는 것은 나의 자유다.
나에게 이미 만들어진 그 길이 어떤 길인지 궁금하다.
언제나 유혹에 휩쓸리는 나의 생활이 걱정이다.
"나는 그들을 샛길로 인도하리라."라고 하신 것처럼!
샛길이 바로 외로움의 광야이다.
'샛길은 말 그대로 외로운 길이기에,
아무도 간 적 없고 자신은 물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조차도 그 길을 모르기에,
도울 수도 같이 가줄 수도 없다.
이는 하느님 홀로 인도자이시고 구원자이심을,
또 이 길을 거친 뒤에 주시는 축복이
우리 가운데서 나오지 않았음을 명백히 하기 위함인 것 같다.
일주일 후의 내 모습을 나는 알 수 없으나 하느님께서는 다 알고 계신다.
시간 안에서의 존재는 불완전함을 내포한다.
이는 변화한다는 뜻도 된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시간을 초월하여 나의 과거, 현재, 미래가 현재로 드러나고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다 알고 계신다.
미사와 성체!
주일 미사는 빠지지 말고, 평일 미사도 가고 싶은데...
현재 상황에서 평일 미사 참례는 어려운 것 같다.
미사 참례를 많이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찾아야겠다.
성체 안의 예수님과 하나 되어 행복과 충만한 기쁨을 맛볼 때
외로움이 사라지며 외로움은 일치감의 결여에서 온 것임을 더욱 절감하게 된다.
이를 체험한 뒤엔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자주 미사에 참례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신령성체를 하게 된다.
주님은 영적으로 예배하여 하나 되기를 갈망하는 사람에게
영적으로 일치하러 오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외로움을 통해 성체의 은총으로 천국에서 맛볼 '일체감'을
이 세상에서 체험하게 된다.
아름다움에 눈길을 멈출 수가 없다.
알면서도 아름다움에는 꼼짝을 못한다.
아름다움에 눈길을 주지 말고, 하느님께로 눈길을 옮기자.
아직도 실천없는 마음 뿐이다.
즉, 눈길을 주님께 향하는 것이다. 그 효과는 엄청나다.
그러나 단순한 행동이라고 게으름을 피우면 우리의 삶은 비애와 고통으로
가득차서 메마른 가지처럼 될 것이다.
이를 뼛속 깊이 체험한 성녀 데레사는 "아아, 주여!
우리의 모든 해는 당신께 눈을 두지 않는 데에서 옵니다."(완덕의 길16,11)라고 하며
쓰라린 경험을 고백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눈길 하나,
한숨 하나가 하느님의 마음에 닿아 그분의 자비가 일하실 수밖에 없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이는 엄마가 방에서 들리는 울음소리만으로 아기가 배가 고픈지,
기저귀가 젖었는지 다 아는 것과 같다.
고움과 아리따움도 땅에서 이는 김과 연기 같은 것,
그런 헛된 것에 빠지지 않으려면 외모가 그렇고 그런 것임을 깨치는 동시에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나게 아름다우신 하느님께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을 두고
이런 피조물들에서 마음을 똑바로 해야 한다.
40대 중반이다. 청춘이라고 반항하지만 늙고 있음을 느낀다.
어떻게 해야 할까? 올바른 길을 가고 싶다.
이제는 즐거움과 낙에 마음을 두지 말자.
육체는 한계를 느끼지만 마음은 여전히 청춘이라고 착각하기에 마음 속의 갈망과 육체가
지니는 한계성을 어떻게 조화시켜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에 따라서 자신이 지금껏 최선을 다해 이룩한 업적들이 별 것 아님을 느끼기도 한다.
물론 아직도 원하면 할 수는 있지만 그럴 의욕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정신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오다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고
숙고할 수 있는 것은 한숨 돌이킬 만큼 경제적, 심리적, 가정적으로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육체적으로 숨가쁘게 뛸 수 없는 나이이기에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시간의 여유로움을 내면의 소리를 듣는 데 쓸 줄 알고,
혼자 있어도 자기 안에 갇히지 않으며 기도 안에서 자신을 초월하고 이탈하는 법을 배운다면,
그래서 내면을 통해 깨달은 바를 외로워하는 이웃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면,
무료하고 외롭던 시간은 축복받은 시간으로 변하게 된다.
주님은 약한 자로 오셔서 언제나 우리의 문을 두드리실뿐 강요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바쁘거나 어떤 일에 골몰해서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할 때도 있고,
들으면서도 "예, 예." 하고는 자기 눈에 급하다고 생각되는 일부터 하느라
하루, 한 달, 1년 동안 주님을 밖에 내버려둔 채 자기 혼자서 정신 없이 살 때도 있다.
만일 어느 누가 지끔까지(40~50세) 외로운 적이 없고 고독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그 신비에 참여하고 싶다면, 하느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것들에 즐거움과 낙을 느낄 마음을 두지 말라.
그러면 자기 안에 하느님께서 들어오실 빈 공간이 자리하게 된다.
마음에 빈자리가 없다.
빈자리가 없어 하느님께서 들어오지 못한다.
욕심 없다고 하면서, 욕심으로 가득찬 자신의 모습을 느낀다.
욕심 버리고, 보다 더 낮은 곳으로 마음을 가지고 싶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의 구유에 태어나신 것은 그곳이 유일하게 빈 자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베들레헴의 외양간처럼 초라하지만 빈 마음(외로움)으로 있다면
예수님은 또 다시 강생하시기 위해 그 빈 마음에 들어오시어 당신으로 채워주신다.
지금도 사람들이 하느님을 위한 여러 가지 훌륭한 계획들에 가득 차서
빈 마음을 만들지 못할 때 예수님은 여전히 외양간에 빈 자리라고 있을까 싶어 찾고 계신다.
성모님과 예수께서 온 세상을 돌아다니시며 당신이 들어갈 자리를 찾으시다가
결국 발견하신 곳이 그들의 작고 가난하고 빈 마음이었으리라.
그 빈 마음이 하느님께는 무엇보다 소중하기에 인간성에 아픔을 느끼는 줄 잘 아시면서도
섭리로써 외로움울 통해 빈 자리를 마련해 가시는 것이다.
- 본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