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는 꽃이 피네
- 지은이 법정(승려) 저/ 류시화 역 / 출판사 문학의숲 / 출간일 1998.06.01
법정스님 책을 읽고 싶다고 하자, 아내가 책 한권을 찾아준다.
아내는 책을 많이 읽는다.
아내는 법정스님 책을 소장하고 있었고, 그 책을 나에게 선물하듯이 건네준다.
원하는 책을 바로 읽을 수 있음에 기쁘다.
자연에 대한 법정스님의 글은 읽고 있는 중에, 아파트 비디오폰이 고장 난 것을 알았다.
그냥 새 것을 살까 하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위하여 최대한 사용 가능한 사용해야 될 같아,
비디오폰을 분해하여 점검해 본다.
반나절을 만졌지만, 수리를 못하고 결국 비디오폰을 구입한다.
시간과 효율을 생각하면 즉시 구입하는 것이 맞지만, 나름 노력했음에 만족한다.
이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생각하면서, 최대한 자연을 보호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다음 글들은 '산에는 꽃이 피네'에서 가져왔습니다.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한다.
꼭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고 따뜻한 말을 나눈다든가 눈매를 나눈다든가 일을 나눈다든가
일을 나누다든가,
함께 살고 있는 공동체와의 유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나누는 기쁨이 없다면 사는 기쁨도 없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외떨어져 독립되어 있다 하더라도 나누는 기쁨이 없다면 그건 사는 것이 아니다.
삶의 질이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따뜻한 가슴에 있다.
진정한 삶의 질을 누리려면 가슴이 따뜻해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마음써야 할 것은 만나는 이웃에게 좀더 친절해지는 것이다.
내가 오늘 어떤 사람을 만났다면 그 사람을 통해서 내 안의 따뜻한 가슴이 전해져야 한다.
그래야 만나는 것이다.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면 내 자신이 기뻐지고,
누군가를 언짢게 하거나 괴롭히면 내 자신이 괴로워진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메아리이다.
마음의 뿌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다.
안으로 충만해지는 일은 밖으로 부자가 되는 일에 못지 않게 인생의 중요한 몫이다.
인간은 안으로 충만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아무 잡념 없이 기도를 올릴 때 자연히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을 느낀다.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써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청빈의 덕이다.
절제된 미덕인 청빈은 그 뜻이 나눠 갖는다는 뜻이다.
청빈은 그저 맑은 가난이 아니라, 그 원뜻은 나눠 가진다는 뜻이다.
십 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 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벽이 무너져 남북이 트이고
추녀가 성글어 하늘이 가깝다.
쓸쓸하다고 말하지 말게.
바람을 맞이하고 달을 먼저 본다네.
인간의 행복은 큰 데 있지 않다.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조그만 데 있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자작나무의 잎에도 행복은 깃들어 있고,
벼랑 위에 피어 있는 한 무더기 진달래 꽃을 통해서도 하루의 일용할 정신적인 양식을 얻을 수 있다.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 속에 행복의 씨앗이 들어 있다.
빈 마음으로 그걸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하나가 필요할 때 하나로써 만족해야지 둘을 가지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그건 허욕이다. 하나로써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또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나눠 가질 줄 알아야 한다.
이웃은 나와 무관한, 전혀 인연이 없는 타인이 아니다.
그들은 내 분신이다. 또 하나의 몸이다.
왜냐하면 한 뿌리에서, 생명의 커다란 한 뿌리에서 나누어진 가지가 바로 이웃이기 때문이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에 있지 않다.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에 있다.
홀가분한 마음, 여기에 행복의 척도가 있다.
남보다 적게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을
거듭 새겨 두기 바란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소유의 진전한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가 있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휠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인 생활 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우리가 보다 인간다운 삶을 이루려면 될 수 있는 한 생활용품을 적게 사용하면서 간소하고,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사람의 삶이다.
소유하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필요한 것이 있더라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생활 필수품이 아니면 자꾸 뒤로 미뤄 보라.
그러면 세월이라는 여과 장치를 통해 정말로 내게 필요한 것인지,
없어도 좋은 것인지 그 기간에 판단이 선다.
그것이 행복의 조건이다.
그저 필요하다고 그때그때 잔뜩 사들여 보라. 그것은 추한 삶이다.
결국에는 물건 더미에 깔려 옴짝 못하게 된다.
구하지 않아도 좋았을 그런 물건들이 우리의 집안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종교는 한 마디로 사랑의 실천이다.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일이다.
흔히 번뇌를 끊는다거나 욕망을 끊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끊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욕망을 끊는다, 번뇌를 끊는다, 말로는 끊을 것 같지만 끊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단지 질적인 변화가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에너지의 전환이다. 업의 전환이다.
탐욕으로 흐르는 일을 베푸는 일로 전환하는 것이다.
또 남을 미워하고 화내는 에너지는 연민의 정과 자비심으로 전환될 수 있다.
어리석음은 한 생각을 돌이킴으로써 지혜로 전환될 수 있다.
또 따뜻한 눈빛을 만나기 어렵다고 했다.
서울이고 시골이고 가봤자 따뜻한 눈빛을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옳은 지적이다.
이 말을 들으면서 내 자신이 그렇구나, 이건 바로 내 얼굴이다,
오늘의 내 모습이고 우리 사회의 얼굴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그만 가게임을 부끄러워하지 말자.
그 조그만 가게에 당신의 인정의 아름다움을 가득 채우자.
상인의 길은 곧 인간의 길이다.
단지 물건만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필요한 상품이기 때문에 인정이 오고가야 한다.
다시 말해 사고파는 차디찬 그런 거래가 아니라
인정이 오고갈 수 있는 인간의 길이 되어야 한다.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 이런 법문이 있다.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편하고 한가함을 구해서가 아니며,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며,
명예나 재산을 구해서도 아니다.
오로지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나려는 것이며,
번뇌의 속박을 끊으려는 것이고,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끝없는 중생을 건지려고 해서다.'
진정으로 세상을 살 줄 아는 사람은 한 해가 지난다고 해서 더 늙지 않는다.
수행자는 그런 덧없는 세월을 한탄할 게 아니라 그 세월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덧없이 살고 있는가,
무가치하게 살고 있는가를 되돌아봐야 한다.
수도자는 우선 가난해야 한다.
가난이 기본이다. 가난해야 그 속에서 진정한 수행이 이루어지고 그 정신이 맑아진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내일 일을 누가 아는가.
이 다음 순간을 누가 아는가.
순간순간을 꽃처럼 새롭게 피어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매순간을 자기 영혼을 가꾸는 일에, 자기 영혼을 맑히는 일에 쓸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갖지 않아도 좋을 것은 갖지 말아야 한다.
갖지 않아도 좋을 것을 우리는 많이 갖고 있는가.
또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의식이 그만큼 분산되고, 사람이 단순해지지 못하고, 더 불순해지는 것이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게 위해선 가진 것이 적어야 한다.
가진 것이 적어야 마음이 편하다.
본래 무일물(本來 無一物)이라 하지 않는가.
아무것도 없이 이 세상에 와서, 아무것도 없이 떠날 뿐이다.
모든 것은 잠시 맡아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이다.
'나쁜 깃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두루 하라.
그러면 저절로 그 마음이 맑아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들의 가르침이다.'
법구경에도 나오고 여러 문헌에도 나온다.
그러므로 마음을 맑힌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선을 행한다는 것이다.
영혼에 나이가 있는가. 영혼에는 나이가 없다.
영혼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그런 빛이다.
어떻게 늙는가가 중요하다.
자기 인생을 어떻게 보내는가가 중요하다.
거죽은 신경쓸 필요가 없다. 중심은 늘 새롭다.
거죽에서 살지 않고 중심에서 사는 사람은 어떤 세월 속에서도 시들거나 허물어지지 않는다.
하나가 필요할 때 둘을 가지려 하지 말라.
둘을 갖게 되면 그 하나마저 잃게 된다.
모자랄까봐 미리 걱정하는 그 마음이 바로 모자람이다.
그것이 가난이고 결핍이다.
부처가 마지막 설한 유교경(遺敎經)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만족할 줄 알아라.
만족할 줄 알면 항상 넉넉하고 즐거우며 평온하다.
그런 사람은 비록 맨땅 위에 누워 있을지라도 편안하고 즐겁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설령 천국에 있을지라도 그 뜻에 흡족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보다 인간다운 삶을 이룩하려면 될 수 있는 한 생활용품을 적게 사용하면서 간소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가 쓰고 있는 모든 물건은 지구상의 한정된 자원의 일부이다.
이것은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들 당대에서 써버리고 탕진할 그런 것이 아니다.
꽃처럼 거듭거듭 피어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늘 새롭게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즐겁게 살되 아무렇게나 살지 말아야 한다.
한 개인의 삶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불안과 슬픔에 빠져 있다면,
그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시간에 아직도 매달려 있는 것이다.
또 누가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잠 못 이룬다면,
그는 아직 오지도 않은 시간을 가불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과거는 강물처럼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과거나 미래 쪽에 한눈을 팔면 현재의 삶이 소멸해 버린다.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항상 현재일 뿐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다면,
여기에는 삶과 죽음의 두려움도 발 붙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