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이끌어 주시는 마리아'를 읽고
- 글쓴이: 가르멜로 콘티 굴리아 | 역자: 장수희 | 출판사: 도서출판 아바 | 2006년 9월 1일
성모님에 대한 궁금증으로 두번째 읽어보는 성모님에 대한 책이다.
우리는 왜 언제나 성모님을 옆에 모시고 기도해야하는지 그 답을 얻는다.
성모님께서 걸으신 신앙의 여정을 다음 다섯가지로 나누어 이야기한다.
성모님께서는 다섯가지 여정에서 제일 먼저 목적지에 도달하신 분이라고 한다.
원조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 인간 존재의 완전함
신부이며 어머니이신 동정녀 - 모든 가정의 이상
왕이신 메시아의 어머니 - 인간 사회의 재건
새로운 인류의 어머니 - 이상적인 종교 사회
승천하신 마리아 - 영원한 공동체
인간이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전능하신 사랑과 어머니의 온화하신 사랑의 결실이다.
창조주와 보잘것없는 피조물 사이의 자유로운 협력에 의해 태어나신 분인 것이다.
보잘것없는 여인!
그러나 전능하신 하느님은 '겸손한 여종'이라고 선포된 마리아가 특별히 선택된 분으로서
자유의지로 결정하는 것을 존중하며 확인해 주신다.
자기 자신을 완성시켜 나가야 하고, 가정을 이루어야 하며,
사회에 봉사해야 하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성화시켜야 하며,
영원한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가운데 마리아를 만날 것이다.
바오로는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필리 1.21)이며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갈라 2.20)이라는 말을 했다.
하느님은 세례를 통해 길을 열어주시고
언제나 원수의 손에 떨어져버린 우리를 다시 일으켜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며,
집에 돌아온 아들을 다시 품어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는 이 최상의 선을 선택했고,
인간은 그 마리아를 따르라고 초대를 받았다.
복음! 간단하게 '기쁜 소식'이라고 풀이를 했는데,
더 깊게 풀이하면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라고 한다.
너무 활기찬 말이다.
나자렛의 가정은 단순하게도 가장 평범하고 자발적인 형태인 '인간' 가정으로 남아있다.
어느 누구도 성실히 일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며 친구들이나 친척들과 가까이 교류하며 살아가는
그 젊은이가 하느님이신 줄을 몰랐었다.
모든 이들은 그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참된 성덕은 단순하고 자발적인 가정의 거룩함으로써,
눈에 띄는 기적 사건들이 없다 하더라도 매일 겪는 일상 속에서
사랑으로 희생을 하는 기적을 가리킨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로 집안을 채우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면 우리의 생활이 풍성해졌는가?
만일 우리가 그것들을 원하는 대로 모두 도구화할 수 있다면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 묶여 산다면 대답은 당연히 '아니다'이다.
누구든지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것들을 갖지 못하면 가난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다음 표현을 생각해보는 것은 유익한 일인 것 같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에 아무 부족함이 없다".
"온 마음과 힘, 온 정신과 영혼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이를 행하라, 그러면 생명을 얻은 것이다"라는 말로써 결론을 내리신다.
나자렛의 동정 신부께서는 그렇게 허름한 집에 살면서 정돈하고 요리하며,
예수님과 요셉의 옷을 궤매면서도 기쁨으로 벅차올랐던 것이다.
성모님의 마니피캇!
가난한 이를 구원하는 삶의 혁명으로 해설한다.
마음에 항상 간직하고 싶다.
얼마나 많은 발전을 했는가! 얼마나 훌륭한 성과를 얻어냈는가!
그렇지만 우리는 "나자렛 집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을 반복해야 한다.
이것은 기술발전을 거부하고 뒷걸음질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퇴보나 파괴를 하는 대신, 자기가 해야 할 임무를 수행하는 숭고한 인간을 되찾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창조해 주시고, 세상을 다스리며 완성시키라고 맡겨주신 그 인간을 되찾기 위해
나자렛으로 돌아가자.
가난! 언제나 가슴에 안고 깊이 생각할 명제이다.
조금씩 숨은 뜻을 느낀다.
신앙인 모두가 가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면 더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우리는 이들을 빈곤층, 없는 이들, 궁핍한 이들,
걸인들, 억압 당하는 이들, 소외된 이들, 제외된 이들,
불완전한 이들 등의 단어를 통해 표현한다.
하느님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과 가난함을 더 원하셨다.
그분이 군중을 향해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루카 6.20)이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박해받는 이들과 무고한 자들은 복되다고 선포하시게 된다.
소유하는 차원을 뛰어넘어 그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또 자신을 바치는 데 전념하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적 가난의 역설적 의미이다.
그리스도인이 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바른 길은
사랑을 위해 가난을 선택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성모님의 위치를 새롭게 안다.
교회는 바로 성모님이다.
예수님 승천후 열두제자가 교회를 세우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열두제자들의 중심에는 항상 성모님이 계셨고,
열두제자들은 성모님께 어머니처럼 의지하고 그 뜻을 그대로 실천한다.
그러니, 교회를 성모님과 같다고 한다.
많은 수도회들은 그 탄생의 기원을 성모님에 두고 있다.
그분을 어머니요 모범으로 여기며.
그리고 그들의 삶을 성모님께 맡기는다는 것이다.
교회의 설립은 완전하고도 훌륭한 것이다.
신랑의 모든 유산과 사명이 신부인 교회에 주어지는 것이다.
이제 혼인 축제를 거행할 때이다.
이 축제는 성령 강림 대축일로서 성대하게 거행되며,
이때 신부는 어머니이신 성모님 바로 곁에 앉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은 약속을 지키셔서 삶과 진리와 사랑의 성령을 보내신다.
이 성령은 교회에게 맡기신 막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힘을 불어 넣어주는 분이다.
마리아가 교회의 모범이자 전형이심을 언급하고 있다.
그분을 모범과 전형으로 표현하는 것은
교회 역시 마리아처럼 동정녀이며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동정녀라고 하는 이유는 성령의 덕에 힘입어 동정녀로서
확고한 희망과 신앙, 그리고 진실한 사랑을 보존해 가기 때문이다.
봉헌은 성인들이나 성모님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알아볼 수 있는 선물을 주실 수 있으며,
인간 자신이 창조주께 절대적으로 속해 있음을 고백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세례를 통해 우리를 자녀로 받아들이시고 당신 가족 안에 넣어주시어
아버지의 섬세한 손길로 우리에게 육신과 영혼의 어머니를 찾아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명하셨다.
그뿐 아니라 모성적 미소로 우리를 맞아주시는
'자비와 생명, 부드러움과 희망의 어머니'이신 여왕을 찾아주셨다.
마리아는 모든 피조물들 위에 계신 여왕으로서,
인간, 윤리, 종교 등의 가치를 뛰어넘는 분이다.
그 분은 선함과 아름다움에 있어서 여왕이신 것이다.
전 역사와 우주를 막론하고,
유일했던 삼위일체의 사건이 이루어진 곳은 마리아이다.
그래서 마리아를 성전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생명이 있고 공동 협력이 가능한 성전이다.
사실 성부는 마리아 안에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면서
당신의 외아들을 그녀에게 보내신다.
마리아는 그것을 받아들였고,
아드님은 그녀의 동정 태 안에 아홉 달 동안 머물러 계셨다.
성령은 그녀 안에서 이와 같이 인간적이고도
신적인 기적(루카1.31 참조) 활동을 하셨다.
그래서 마리아는 하느님 성부와 함께 어머니가 되었고,
하느님의 아들은 그녀의 아들이 되었다.
- 본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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