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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자리에 다시 와서 - 이상규

bike 2006. 12. 21. 11:35

   이제, 빈 들길을, 비어 있어 억새꽃 더욱 우수수 일어서는 들길을 구름을 밟듯 걸어 볼란다. 먼 기억의 저편에 사름사름 사려두었던 처음 그자리에 다시 와 해질녁 드문드문 귀가를 서두르는 농부들 발소리 산그리메로 오는 길, 쫒기듯이 발등 적시며 질러 왔던 길, 그래서 늘 에돌기만 하던 그 길도 다시 걸어 볼란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른 풀들이 서걱이는 이야기도 들어 볼란다. 마디풀, 지칭개, 꽃마리, 쇠비름 미처 제 배냇이름도 불러 주기 전에 발길에 밟혀 잊혀진 잡초들이 저들끼리 하는 이야기며, 방아깨비 한 마리 질경이 한 포기도 그냥 왔다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며 제 그늘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사연들도 들어 볼란다.

 

  연잎에 소낙비 쏟아지듯 서둘러 왔던 그 길.  모가지가 꺾여 제 속에 이는 바람에도 만가를 풀어내는 수숫대 발 아래 숨어 사위어가는 목숨에 입 맞추는 풀벌레, 그리고 시린 이파리 그 이름 앞에 연초록, 갈맷빛, 샛노랑 이런 예쁜 낱말 하나씩 붙여도 보고

 

  여울물이 제 살갗 부비는 강머리에서 아슴한 봄내음이 켜켜이 전설로 쌓인 할매의 웅숭깊은 눈 속에 흐르다가 고이고 고였다가 흐르는 강물의 내력도 처음 그 자리에 다시 와 들어 볼란다.



이상규
- 경남 함안 출생
- 1991년 '문학세계' 등단
- 제1회 가락문학상 수상
- 시집 '응달동네' '사랑 가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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