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놓치다
골판지 깔고 입주한지 얼마 안 되는
말수 없고 어깨 심히 휜 사내를 향해
눈곱이 다층으로 따개비를 이룬
맛이 살짝 간
나 어린 계집의 수작이 한창 물올랐다
농익은 구애가 사내의 귓불에 가 닿자
속없는 물건은 불끈 일어서고
새벽, 영등포역
지하도에 내몰린 딱한 사내와
쫓겨난 비렁뱅이 계집이 눈 맞았는데
기어들어 녹슨 나사 조였다 풀
지상의 쪽방 한 칸 없구나
달뜨고 애태우다
제풀에 지쳐 잠든 사내 품에
갈라지고 엉킨 염색모 파묻은
계집도 따라 잠이 들고
살 한 점 섞지 않고도
이불이 되어 포개지는
완벽한 체위를 훔쳐보다가
첫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고단한 이마를 짚고 일어서는
희붐한 빛,
저 철없는 아침
얼음 호수
제 몸의 구멍이란 구멍 차례로 틀어막고
생각까지도 죄다 걸어 닫더니만 결국
자신을 송두리째 염해버린 호수를 본다
일점 흔들림 없다 요지부동이다
살아온 날들 돌아보니 온통 소요다
중간중간 위태롭기도 했다
여기 이르는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세상으로부터 나를
완벽히 봉封해 본 적 있던가
한 사나흘 죽어본 적 있던가
없다, 아무래도 엄살이 심했다
손세실리아
- 1963년 전북 정읍 출생
- 2001년 '사람의 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 시집으로 '기차를 놓치다'
'좋은글+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Always - 본조비 (0) | 2006.05.22 |
---|---|
나는 남자보다 적금통장이 좋다. (0) | 2006.05.15 |
지금은 알 것 같습니다. - 이수오 (0) | 2006.04.30 |
밤기차 / 토갓마을 이씨 가로되 - 안상학 (0) | 2006.04.30 |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 복효근 (0) | 2006.0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