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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놓치다 / 얼음 호수 - 손세실리아

bike 2006. 5. 13. 03:45

기차를 놓치다


골판지 깔고 입주한지 얼마 안 되는
말수 없고 어깨 심히 휜 사내를 향해
눈곱이 다층으로 따개비를 이룬
맛이 살짝 간
나 어린 계집의 수작이 한창 물올랐다
농익은 구애가 사내의 귓불에 가 닿자
속없는 물건은 불끈 일어서고


새벽, 영등포역


지하도에 내몰린 딱한 사내와
쫓겨난 비렁뱅이 계집이 눈 맞았는데
기어들어 녹슨 나사 조였다 풀
지상의 쪽방 한 칸 없구나
달뜨고 애태우다
제풀에 지쳐 잠든 사내 품에
갈라지고 엉킨 염색모 파묻은
계집도 따라 잠이 들고


살 한 점 섞지 않고도
이불이 되어 포개지는
완벽한 체위를 훔쳐보다가
첫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고단한 이마를 짚고 일어서는
희붐한 빛,
저 철없는 아침



 

얼음 호수


제 몸의 구멍이란 구멍 차례로 틀어막고
생각까지도 죄다 걸어 닫더니만 결국
자신을 송두리째 염해버린 호수를 본다
일점 흔들림 없다 요지부동이다
살아온 날들 돌아보니 온통 소요다
중간중간 위태롭기도 했다
여기 이르는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세상으로부터 나를
완벽히 봉封해 본 적 있던가
한 사나흘 죽어본 적 있던가
없다, 아무래도 엄살이 심했다



손세실리아
- 1963년  전북 정읍 출생
- 2001년 '사람의 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 시집으로 '기차를 놓치다'